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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윤여정이 있어 자랑스럽다”노년의 프라이드 느낀 엄마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현주의 즐거운 갱년기(62)

5월 8일 어버이날, 엄마와 아빠를 집으로 모셨다(나이 오십이 넘었지만 난 아직도 부모를 이렇게 부른다). 부모님과 함께라면 8인까지 식당 입장이 가능하다는 뉴스는 들었지만, 가족관계증명서를 들고 붐비지 않는 식당을 찾는 것보다 집에서 맛집 메뉴 몇 가지를 사다가 먹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동네 맛집으로 유명한 해물찜집과 족발집을 돌며 미리 주문한 메뉴를 픽업했는데, 어버이날 특수인지 가게 안이 꽉 찬 것은 물론 밖으로도 여러 명 대기하고 있었다. 코로나 확진자가 하루 500명 넘는 상황에서 80세 가까운 나이의 부모님과 식당을 전전하지 않기로 한 건 좋은 결정이란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손녀딸과 함께 편한 식사를 하신 부모님 얼굴도 만족스러워 보였으니 말이다.

.코로나 백신 맞으러 간 병원에 75세 이상 노인들만 있는 걸 보고 나이 들었음을 실감했다는 엄마와 아빠. [사진 Matthew Bennett on unsplash]

.코로나 백신 맞으러 간 병원에 75세 이상 노인들만 있는 걸 보고 나이 들었음을 실감했다는 엄마와 아빠. [사진 Matthew Bennett on unsplash]

“엄마, 그래서 백신 2차까지 맞으셨는데, 맞고 나서 힘들거나 열나거나 그러진 않았어요?” “응, 나도, 네 아빠도 괜찮았어. 처음 맞을 때보다 두 번째가 더 수월하더라.” 75세 이상 어르신의 접종이 시작된 후 부모님은 백신 2회 접종을 다 마친 참이었다. “아직 2차 접종까지 끝내지 못한 친구도 많은데, 우리 동네는 빨리빨리 진행되는 것 같더라고. 다행이지 뭐니. 너희 부부는 가을이 되어야 맞겠구나. 빨리 맞으면 좋을 텐데.”

부모님과의 대화의 시작은 늘 그렇듯 코로나에 관한 이야기였다. 사실 요즘은 누구를 만나도 그렇기는 하다.

“근데 말이다, 보건소에 백신을 맞으러 갔는데 접종 후 15분 이상 기다렸다 나가야 하잖니. 앉아서 거기 온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들더라. 75세 이상 노인들…. 나처럼 걷는 게 힘든 분들도 있고. 그분들을 보며 새삼 내 나이를 다시 느꼈어. 나도 나이든 노인이구나 뭐 이런 생각, 하하하.”

하긴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르신들 동네 모임에 참석한 적이 없고, 게다가 코로나 이후에는 가끔 친구 몇 분과 왕래할 뿐 줄곧 집에만 계시던 차였으니 그렇게 많은 또래(혹은 연장자)를 한꺼번에 보는 일이 드문 일일 것이다. “근데 나만 그런 게 아니더라. 친구도 주사 맞고 와서, 우리가 언제 이렇게 나이가 들었을까 하며 전화가 왔었어.”

영화 '미나리'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배우 윤여정 씨의 입국 모습. 윤여정 씨의 최근 모습은 엄마에게도 큰 기쁨과 자극이 된 듯하다. [뉴스1]

영화 '미나리'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배우 윤여정 씨의 입국 모습. 윤여정 씨의 최근 모습은 엄마에게도 큰 기쁨과 자극이 된 듯하다. [뉴스1]

그때 마침 뉴스에서 윤여정 씨가 귀국했다는 내용이 방송됐다.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 이후 미국 아들 집에 머물다 돌아온 것인데, 코로나 상황 때문에 따로 기자회견 없이 새벽에 조용히 입국했다는 것이다. 항공점퍼에 진 팬츠를 입고 백 두 개를 크로스로 메고 들어온 윤여정 씨를 보던 엄마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멋있지 않니. 요즘 친구들과 ‘윤여정이 있어 자랑스럽다’, 이런 이야기 많이 해. 70대에 오스카상을 받은 것도 그렇지만, 그 쟁쟁한 외국 배우들이 앉아있는 시상식장에서 하나도 꿀림 없이 하고 싶은 말을 위트있게 해내는 그 사람을 보면서 왠지 우리 친구 중 누가 좋은 상을 받은 것처럼 뿌듯하더라고.” 윤여정 씨의 수상과 함께 그녀의 행보가 젊은이에게 귀감이 되었다는, 닮고 싶은 좋은 어른의 모습이라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또래에게조차 이런 느낌을 주었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다.

지난 3월 행정안전부의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 주민등록인구는 5170만5905명, 이 중 65세 이상 인구는 857만명, 70세 이상 인구는 572만명이다. 다른 세대의 인구수는 줄어든 반면 노년층의 인구는 작년 말과 비교해도 증가하는 추세다. 지난 10년 동안의 추이를 보아도 65세 이상 고령 인구 비중은 11.2%에서 16.6%로 큰 폭으로 늘었는데, 2017년 고령사회(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14% 이상)에 진입한 이후 빠른 속도로 초고령사회(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 이상)로 움직이고 있다. 이번 발표에 따르면 전남(23.7%), 경북(22.0%), 전북(21.6%), 강원(21.0%)은 이미 초고령사회에 진입했으며, 부산(19.6%), 충남(19.3%), 충북(18.3%), 경남(17.7%), 대구(16.9%), 서울(16.2%), 제주(15.9%), 대전(14.6%), 광주(14.4%), 인천(14.2%) 등 10곳은 고령사회, 경기(13.4%), 울산(12.9%), 세종(9.9%) 등 3곳은 고령화 사회로 나타났다.

이 정도로 노년층이 증가한 상황에서 이들에게 주목하는 부분은 노년기의 신체적, 정신적 변화와 사회적 역할과 관계, 이들을 위한 돌봄 정책 등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걱정의 대상이 된 느낌이 들던 와중에 윤여정 씨의 수상은 또래 어른들에게 남다른 프라이드가 된 것 같다. 하긴 생각해 보면 TV 드라마 속 노년의 여성은 대부분 가족 안의 인물로 등장한다. 고부갈등을 일으키는 시어머니나 희생하는 어머니, 혹은 신체적인 노화로 힘들어하고 그로 인해 가족들이 걱정하는 대상 등 말이다. 브라운관을 통해 그런 인물들을 보고 자신과 동일시하거나 비교했던 엄마와 친구분들은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여배우가 지금껏 해왔던 일(연기)에 대한 평가를 세계인들로부터 받았다는 게 놀랍고 감동스러운 것이다. "남색 드레스가 멋있었다, 세계인이 주목하는 단상 위에 하나도 꿀리지 않더라, 어쩜 영어도 그렇게 잘하니" 등 또래 배우에 대한 칭찬이 끝나지 않았다. “근데 다른 것보다 그 말이 좋았어. ‘아들들아, 엄마가 일 열심히 해서 받은 상이다’” 미소를 띠며 이야기를 이어가시는 엄마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엄마도 아빠도 열심히 했는데, 그런 말을 할 기회가 없었구나. 들어주는 사람도 없었구나. 쿨하고 멋진 그 여배우처럼 나이 들고 싶은데, 그렇지 못한 상황이 안타깝구나. 윤여정의 젊은 시절 필모그라피를 다시 언급하며 호기심을 갖는 것처럼, 나도 엄마·아빠의 젊은 시절 사진이라도 꺼내 ‘한창’이었던(그렇게 생각하시는) 그때 이야기를 꺼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 코스모폴리탄·우먼센스 편집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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