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가 부끄럽지 않아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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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재수생이면 다 같나요. 원치 않는 학과에 들어가 헤매는 것보다 「우등재수생」 이 훨씬 낫죠』
대입학력고사를 눈앞에 두고 서울D학원 앞 제과점에서 잠시휴식중인 재수생 최모군 (19).
올 재수생들 중에는 자신을 포함해 학력고사 2백70점 이상자가 많아 예전처럼 부끄럽다거나 열등감에 빠질 이유가 없는 「따로 재수생」 이라며 자신의 「재수 관」을 떳떳이 (?) 밝힌다.
학원수강을 끝내고 두 달 째 독서실에서 막바지 총 정리를 하고있는 김모군 (19)은 지난해학력고사 2백98점을 따 서울대에 지원했으나 실패한 자칭「불운아」.
그러나 비록 재수생이 됐지만 오전2시쯤 독서실을 나설 때면 왠지 뿌듯한 성취감에 젖곤한다. 작년 고3때 학력고사를 앞두고 목을 죄는 듯한 불안·긴장감을 느끼지 않아도 될 만큼 「우등재수생」으로서 자신이 붙었기 때문이다.
4년 전 기대를 걸었던 큰딸(24) 이 학력고사 2백30점으로 입시에 실패하자 딸이 재수하는 동안 대학생 자녀를 둔 이웃· 친척들을 볼 때마다 공연스레 자격지심이 들어 수험뒷바라지조차 짜증스러워했던 김군의 어머니 (46) .
『전에는 남들 앞에서 딸이 재수한다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으나 올해는 아들이 재수하는 것이 부끄럽기보다는 안심되고 대견스럽게 여겨져요』 지난해부터 실시된 「선 지원-후 시험」에 따라 고득점 자들이 이렇듯 재수에 몰린 이른바 재수생의 새 풍속도.
3백 점 대 학생들까지도 세칭 2류 대의 장학생을 마다하고 「같은 재수생」 이 아닌 「대우받는 우등 재수생」 을 선택하고 있다.
『여기에는 올해부터 재수생 징집1년 연기혜택이라는 대통령선거공약도 학력고사 사상 유례없는 고득점 재수생 군을 이루는데 한몫을 했습니다』
서울C고 박모 교사(51)는 『그래서 고득점재수생들이 재수를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기는 기현상이 나타나 학교교육의 정상화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등장했다』 고 지적했다.
징집연기혜택은 가뜩이나 26만 명이 넘는 재수생문제가 사회문제로까지 대두된 마당에 교육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
교육에도 엄연한 과정이 있는데 이런 선거공약이 나온 발상자체가 문제일 뿐 아니라 징집연기 공약은 결국 재수를 부채질하는 모순이 아니냐고 박교사는 반문한다.
C고를 나와 3수를 하던 오모군 (20) 의 경우 올해 징집대상이었으나 연기혜택으로 4수 끝에 서울대에 들어갔다.
4수생 오군은 개인적으로는 성공한 셈이지만 재학생과 재수생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엄청나 징집연기혜택이 「재수를 권하는 사회」가 되지 않을지 염려된다고 일선 고교교사들은 입을 모은다.
서울S공고를 지난해 나온 한 모군 (20) 은 지난 4월 현역입영통지서를 받았으나 연기한 채 K학원에서 재수중이다.
징집연기제도가 3수까지는 거의 보장된다는 한군은 자신처럼 징집 연기한 3수 생이 한반(1백10명) 에 2O명쯤 된다고 말한다.
선 지원·후 시험제가 실시되고부터 고득점 재수생이 크게 늘어나면서 명문대 입학 률의 판도를 바꾸어 놓고있다.
서울대의 경우 88학년도 입학생 중 재수생이 23%에 불과했으나 올해는 2배 가까운 43·4%를 차지했고 연세대는 올해 재수생 합격률이 50%를 넘어섰다.
또 고려 대는 27·9%에서 37·9%, 이대는 14%에서 26%로 급증해 이 같은 추세에 따라 3∼5년 후에는 명문대의 재수생 합격률이 50%를 넘어서 재학생들이 들어설 자리가 좁아지고 있다는 것이 입시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서울K고 3년 정주임 교사(48)는 『이에 따라 재학생들 사이에도 어느새 재수선호 풍조가 퍼져 재수바람이 거세지는 현상』이라고 했다.
H고3년 송모군 (18) 은 초읽기에 들어가야 할 지금 「대입2개년 계획」을 세워놓고 영·수 기초를 다지며 느긋해 하고 있다.
내신 3등급은 자신한다는 송군은 대인을 포기하지 않지만 재학 중 내신성적에 우선 신경을 쓴다는 것이 1차 목표다.
전기 대 실패 때 곧장 재수에 돌입하겠다는 송군은 『자신같이「재수파 고3」이 반마다 절반이 넘는다』 고 털어놓았다.·
1차 내신목표를 달성하면 재수 때 시간낭비 없이 9과목에만 전념, 45점 정도는 더 딸 수 있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고 기대하는 한 재수생 의식조사도 있다.
재수가 부끄럽게 여겨졌던「선 시험-후 지원」때와 달리 재수를 떳떳하게 여기는 「선 지원-후 시험제」 . 이제 「재수가 선망되는 시대」로 마주치고 있다.
재수생이 대입에 강세를 보이면서 「재수가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를 보장한다」 는 심리가 학생·학부모사이에 봇물처럼 번져 학교교육을 뒤흔들고 엄청난 교육낭비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현실이다.
「재수는 필수, 3수는 선택」이 된 재수생문제. 교육전문가들은 학교교육으로 가릴 수 있는 대입제도전환과 실업교육의 정착이 이뤄지지 않는 한 대입제도에 따라 이 같이 재수풍속도가 바뀌고 재수생을 양산하는 악순환을 막을 길이 없다는 지적이다. <안남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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