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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삶을 살려주는 곳…묘지서 태어난 ‘레바논 아이들’

중앙일보

입력

중동 국가 레바논 트리폴리에 있는 한 묘지에 150가구가 넘는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그 곳에서 나고 자라는 아이들이 있다고 AFP통신이 최근 보도했다.

내전, 생활고에 거처 잃고 모여들어 #150가구 트리폴리 묘지서 거주 중 #부모는 청소·시신매장 생계유지 #아이들, 묘지가 출생지이자 놀이터 #

'고라바(이방인이라는 뜻)' 묘지에 사람이 정착하게 된 것은 지난 1955년 카디샤 계곡이 범람하면서부터라고 한다.

레바논 트리폴리의 묘지에서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 이 아이들의 상당수는 묘지에 위치한 거주지에서 나고 자랐다. [AFP=연합뉴스]

레바논 트리폴리의 묘지에서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 이 아이들의 상당수는 묘지에 위치한 거주지에서 나고 자랐다. [AFP=연합뉴스]

그 뒤로 레바논 북부 아카르 평원 등에서 빈민들이 하나둘 모여들면서 묘지는 사람들이 사는 터전이 됐다.

레바논 내전(1975년~1990년) 등 혼란기에 갈 곳이 없어진 사람들까지 묘지 주변에 모여들며 공동체가 형성됐다. 한때는 1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여기 살았다.

AFP통신은 "2019년 이후 묘지 거주자는 더 늘어나 현재는 새로운 사람들이 더 들어올 공간이 없어졌다"면서 "이미 레바논인 120가족과 시리아인 30여 가족이 묘지에서 살고 있다"고 전했다. 레바논에는 내전 위기 속에 피신한 시리아인이 100만명 가량 거주중이다.

레바논 트리폴리의 고라바 묘지에 거주중인 3세~13세 아이들의 모습 [AFP=연합뉴스]

레바논 트리폴리의 고라바 묘지에 거주중인 3세~13세 아이들의 모습 [AFP=연합뉴스]

묘지 주민의 상당수는 트리폴리 시내에서 청소업을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일부는 죽은 사람을 매장하는 것을 도우며 돈을 벌고 있으나 수입은 극히 적다. AFP통신은 "주민 대부분은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으며 외부의 도움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사람들도 많다"고 덧붙였다.

한 소년이 레바논 트리폴리의 고라바 묘지의 건축물 위에 앉아 있다. [AFP=연합뉴스]

한 소년이 레바논 트리폴리의 고라바 묘지의 건축물 위에 앉아 있다. [AFP=연합뉴스]

부모가 묘지에 터전을 꾸리다 보니 이 묘지에 사는 아이들은 대부분 묘지에서 태어나고 자라왔다. 이들의 이야기는 다큐멘터리 영화 '낯선 사람들'에서 다뤄지기도 했다.

생활 조건은 열악하다. 비영리단체인 케어 인터내셔널에 따르면 묘지에 사는 주민들의 집에는 가구가 하나도 없는 곳이 많으며 화장실도 대부분 문이 없다.

레바논 트리폴리의 묘지 무덤에 걸터 앉아 있는 소년. 레바논인 120가구와 시리아인 30가구가 이 곳에 거주중이다. [AFP=연합뉴스]

레바논 트리폴리의 묘지 무덤에 걸터 앉아 있는 소년. 레바논인 120가구와 시리아인 30가구가 이 곳에 거주중이다. [AFP=연합뉴스]

이런 절망적인 상황은 트리폴리 묘지 주민만의 문제는 아니다. 유엔에 따르면 레바논 인구 약 600만명 가운데 절반 이상이 빈곤층에 속한다.

레바논은 1975년~1990년 벌어진 유혈 내전 이후 최악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미 CNBC 방송이 전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상황에 더해 지난해 8월 수도 베이루트에서 일어난 대폭발 후유증까지 겹쳐 레바논 경제는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다. 당시 대폭발 참사로 200명 이상의 사망자와 약 6000명의 부상자가 나왔다. 항구 폭발에 대한 조사는 현재도 여전히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미국 CNBC는 "레바논은 휘청거리고 있다"면서 "레바논 통화는 지난 18개월간 화폐 가치의 90%를 잃었고 식량 인플레이션율은 400%에 달했다"고 전했다.

레바논 트리폴리의 한 묘지에 사는 아이들. 이들의 상당수는 이 곳에서 나고 자랐다. [AFP=연합뉴스]

레바논 트리폴리의 한 묘지에 사는 아이들. 이들의 상당수는 이 곳에서 나고 자랐다. [AFP=연합뉴스]

서유진 기자 suh.yo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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