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주치의] 화병, 월드컵이 약 ?

중앙일보

입력

응어리 훌훌 … 환자 발길 뚝
나만의 취미에 푹 빠져
매일 매일을 월드컵 기분으로 !

우리나라에서 유래한 질병이 있습니다. 바로 화병입니다. 영어론 발음 나는 대로'Hwabyung'으로 표기합니다. 1996년 미국 정신의학회는 화병을 정식 질병의 하나로 공인했습니다. 외국의 정신과 의사에게도 '화병'이라고 발음하면 모두 알아듣는다는 뜻입니다.

화병은 반만년 동안 '한'을 품고 살아온 우리 민족 특유의 정서에서 비롯된 질병입니다. 고부갈등이나 남편의 외도 등으로 한숨을 푹푹 쉬며 가슴앓이를 하는 주부들이 전형적 사례입니다. 화병을 확대 해석하면 다양한 증세로 나타납니다. 밥만 먹으면 체한 듯 소화가 안 되는 사람, 가슴이 두근거리고 식은땀이 나는 사람, 설사와 변비가 교대로 나타나 애를 먹는 사람, 밤에 잠이 안 와 고민하는 사람,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고생하는 사람, 목에 무엇인가 걸린 듯한 이물감을 호소하는 사람….

검사해도 대부분 정상으로 나옵니다. 몸의 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슴속에 쌓아둔 응어리가 원인입니다. 이 경우 해답은 자명합니다. 어떤 형태로든 응어리를 풀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선 백약이 무효입니다. 이를 현대의학에선 배설(catharsis) 혹은 환기(ventilation)라고 합니다.

월드컵 열기가 뜨겁습니다. 월드컵은 훌륭한 배설과 환기의 수단입니다. 기억하다시피 2002년 월드컵 당시 병원을 찾는 환자가 급감한 적이 있습니다. 수십 년 개원한 베테랑 의사들도 이런 경우는 난생처음이라고 할 정도로 환자가 없었습니다. 4강 신화로 한민족의 응어리가 모처럼 말끔히 씻겼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씻김굿 역할을 한 것이지요. 올해도 선수들의 선전으로 우리 국민의 화병이 모두 사라졌으면 합니다.

그러나 월드컵은 4년마다 열리는 한시적 행사입니다. 결과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께 배설과 환기를 위한 자신만의 출구를 마련해 달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종교나 운동, 취미 등 기왕이면 건전한 수단이 좋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적절한 통제가 있다는 가정 아래 술과 담배도 마냥 나쁘진 않다고 봅니다. 마음속 응어리를 쌓아두는 것이 술이나 담배보다 해롭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삶이 힘들고 스트레스도 피할 수 없다지만 그래도 내가 이것을 하는 동안만큼은 시름을 잊고 편안해질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 건강과 경쟁력의 요체이기 때문입니다.

홍혜걸 객원 의학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