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서 다시 불붙는 '안락사' 논쟁

중앙일보

입력

미국 연방대법원이 5일부터 안락사 논쟁에 관한 심리에 착수했다. 이를 계기로 미국 사회에 안락사 찬반 논란이 다시 불붙고 있다. 최근 미국 내 안락사 문제는 지난 4월 플로리다주에서 15년간 식물인간으로 살아오던 테리 샤이보(41.여)가 법원의 결정으로 사망에 이르면서 크게 부각됐었다.

현재 미국에선 유일하게 오리건주만 안락사를 허용하고 있다. 오리건주는 1997년 '품위 있는 죽음에 관한 법(Death with Dignity Law)'을 만들었다. 치유 가능성이 전혀 없는 불치병 환자에게 의사가 편안하게 죽을 수 있도록 약을 조제해 주는 걸 허용하는 법이다. 물론 환자와 보호자가 원해야 한다.

오리건주에서 이 법이 제정된 이후 326명의 환자가 약을 받아갔고, 그 중 208명이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법의 취지는 간단하다. 회생 불가능한 상태에서 극한의 고통을 안고 사는 환자들에겐 품위 있게 죽을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CNN 방송은 5일 치유 불가능한 백혈병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사는 오리건주의 한 남자(58)를 소개했다. 그는 취재진에게 자신이 죽기 위해 꾸며 놓은 침대를 보여줬다. "내가 도저히 고통을 참을 수 없을 때 의사가 지어준 이 약을 먹겠다. 침대에 누워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의연히 죽음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 연방 정부는 몇 년 전부터 오리건주의 안락사에 제동을 걸고 있다. 2001년 당시 법무장관 존 애슈크로프트는 "환자들의 죽음을 돕는 약을 지어주는 의사들에 대해 면허 정지 조치를 취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70년에 제정된 연방법에 '의사는 환자에게 죽음에 이르는 약을 줄 수 없다'는 조항을 들어 이 같은 조치를 내렸다.

그 뒤 연방정부와 오리건주 사이에 소송이 벌어졌는데 고등법원에서 오리건주가 이겼다. "연방정부는 주정부 소관인 의료 분야 법률에 개입하는 것이 온당치 않다"는 게 판결 요지였다. 이에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대법원에 상고했다. "하느님이 부여한 생명을 인위적으로 끊는 것은 살인"이라는 게 부시 대통령의 종교적 믿음이자 철학이기 때문이다. 올 초 법원이 테리 샤이보에게 부착된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때도 부시 대통령과 그의 동생인 젭 부시 플로리다 주지사는 이 명령을 무효화하기 백방으로 노력했다. 안락사 심리는 최근 취임한 존 로버츠 미 대법원장에게 떨어진 첫 과제라는 점에서도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안락사에 관한 대법원의 판단이 낙태, 총기 사용, 공립학교의 진화론 수업 등 굵직한 사회 현안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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