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 빚이 처음으로 1700조원을 넘어섰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말 가계신용 잔액을 1726조1000억원으로 집계했다고 23일 밝혔다. 지난해 말 가계신용 잔액은 2019년보다 125조8000억원 불어났다. 가계신용은 은행·보험·저축은행 등 금융회사 대출(가계대출)과 신용카드 등 외상 구매액(판매신용)을 더한 것이다.
작년 126조 늘어 4년만에 최대폭 #증가율 1분기 4.6%, 4분기 7.8% #주택대출 규제에 주식열풍 겹쳐 #신용대출 증가액, 주담대 추월 #“집값·주식 급락땐 시한폭탄 우려”
지난해 가계 빚은 박근혜 정부 시절 “빚내서 집 사라”고 했던 2016년(139조원) 이후 4년 만에 가장 많이 증가했다. 연간 가계 빚 증가액은 2015년(118조원)부터 2017년(108조원)까지 3년 연속 100조원을 넘어섰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 각종 부동산 대출 규제를 내놓자 2018년(86조원)과 2019년(63조원)에는 가계 빚 증가 속도가 둔화했다. 하지만 지난해 ‘코로나 버블(거품)’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집값과 주가가 들썩이자 ‘빚투’(빚내서 투자)에 나선 사람들이 늘어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분기별 가계 빚 증가율(전년 동기 대비)은 지난해 1분기 4.64%에서 지난해 2분기에는 5.17%로 높아졌다. 지난해 3분기(6.97%)와 4분기(7.86%)에는 가계 빚 증가 속도가 더 빨라졌다.
지난해 부동산 대출 규제의 ‘풍선효과’로 신용대출이 크게 늘었다. 소비자들이 집을 살 때도 필요한 돈의 일부를 신용대출로 마련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은은 분석한다. ‘동학개미’로 불리는 개인 투자자들 중에도 신용대출로 투자금을 마련해 주식시장에 뛰어든 경우가 적지 않은 것으로 한은은 보고 있다.
한은은 신용대출을 기타대출 항목에 포함해 통계를 낸다. 지난해 말 기타대출 잔액은 719조5000억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9월 말(695조1000억원)보다 24조3000억원이 늘었다. 분기별 기타대출 증가액으로는 역대 최고였다. 지난해 3분과 4분기 기타대출 증가액은 두 분기 연속으로 주택담보대출 증가액을 넘어섰다. 송재창 한은 금융통계팀장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한 생활자금 수요의 영향도 있다”고 설명했다.
신용카드 등의 외상 구매 잔액은 지난해 말 95조9000억원이었다. 지난해 9월 말보다 2000억원 줄었다.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소비 감소가 원인이라고 한은은 보고 있다.
코로나19로 실물 경제 회복이 더딘 상황에서 가계 빚이 급증하는 것은 경제 전반에 위험 신호일 수 있다는 의견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나온다. 만일 앞으로 집값이나 주가가 급락하면 막대한 빚을 얻어 집이나 주식을 산 가계의 충격이 커질 수 있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는 “최근 급증한 가계 빚의 상당 부분은 부동산 거품과 연관돼 있다. 정부의 공급대책 등으로 집값이 내려갈 경우 가계 부채가 ‘시한폭탄’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신용대출 등 가계대출 증가 속도가 지나치게 빨라져 관련 대책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금융사별로 관리하던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를 대출 고객별로 전환하는 내용이 대책의 골자가 될 것으로 보인다. 여러 금융회사를 합쳐 DSR이 일정 수준을 초과하는 고객은 추가 대출을 받기가 어려워질 수 있다.
다만 금융위는 코로나19로 생계가 어려워진 사람들을 고려해 일률적으로 가계 대출을 조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 금융위는 앞으로 2~3년 동안 가계 대출 증가율을 관리 목표치(4~5%) 수준으로 되돌리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안효성·윤상언 기자 youn.sangu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