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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오종남의 퍼스펙티브

인간을 생산요소로만 생각하던 때는 지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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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뉴노멀 시대 인적 자본 교육

게리 베커(1930~2014) 미국 시카고대 교수는 경제 발전에 사람의 중요성을 강조한 인적 자본 이론의 기초를 확립한 공로로 1992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인적 자본을 많이 보유한 근로자일수록 일의 성과를 잘 내기 때문에 급여를 많이 받을 수 있으며 이러한 근로자가 많은 나라일수록 경제 발전이 촉진된다. 인적 자본은 개인이 지닌 기술·지식 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교육이나 훈련을 통해 축적된다.

20세기엔 양질의 노동력이 경제 발전 가져왔지만 #21세기는 지식과 함께 리더십·인성 갖춘 인재 원해 #개인 차이 존중하는 맞춤형 교육으로 전환하고 #예의·배려·염치 등 인성 교육에 관심 쏟아야

천연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는 경제 발전 과정에서 사람에 대한 투자인 교육을 중시하는 전략을 선택해 성공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기능 인력 개발을 위한 공업고등학교 지원이다. 공고생들에게는 정부 예산으로 다양한 장학금 혜택과 기숙사 무료 제공 등의 기회를 부여하고 우수한 실습 기자재를 지원했다. 기능인의 사회적 지위 향상에도 관심을 기울여 고교 출신도 기능장까지 오를 수 있도록 했다. 이는 대학 출신의 기능사와 동등한 대우였다.

근로자 전공·직업 불일치

오종남의퍼스펙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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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수저’라 하더라도 교육 기회를 잘 활용하면 계층 사다리를 오를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었다. 기능인뿐 아니라 과학기술 인력에 대한 처우에도 신경을 썼고, 연구개발 투자도 공공부문에서 선도해 나갔다. 당시 교육은 전반적으로 베커 교수가 말한 인적 자본을 키워 근로자가 하는 일의 성과를 높이는 데 초점을 두었다.

근로자의 인적 자본은 기업 입장에서는 생산요소, 즉 노동력이다. 기업들은 교육을 통해 축적된 인적 자본인 질 좋은 노동력의 혜택을 톡톡히 본 셈이다. 덕분에 1960년대 초 경제 개발을 시작할 당시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 미만이던 우리나라는 수출을 늘리고 경제 발전을 이룩했으며, 이를 발판으로 민주화라는 정치 발전도 이룰 수 있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도 우리나라 교육의 우수성을 언급하면서 미국 교육이 상대적으로 뒤떨어졌음을 인정했다.

오늘날 우리나라 교육은 어떤가? 인적 자본을 제대로 축적하고 있는가? 우선 인력 수급상 미스매치 문제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크다. 고등학교 졸업생의 대학 진학률은 70% 수준으로 여전히 높지만, 산업 현장에서는 쓸 만한 사람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가 많이 들린다. 대기업 인사 담당자들은 “주요 대학의 컴퓨터공학 전공자를 구하기가 대단히 힘들다. 전공한 졸업생이 소수인 데다, 쓸 만한 인재다 싶으면 구글이나 아마존 같은 외국 기업에 취업하거나 유학을 가버린다”고 푸념한다. 한국개발연구원(KDI)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대졸 근로자의 전공과 직업이 부합하지 않는 비율은 약 50%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개 회원국 중 가장 높은 수준이다.

3만 달러에 맞는 인적 자본 배양

풍부한 양질의 노동력으로 경제 발전에 성공한 20세기와 달리 21세기는 훌륭한 인재가 요청된다. 인재는 지식인이나 기술자가 아니라 지적 기반 위에 리더십과 인성을 겸비한 사람이다. 더욱이 미래에는 현재 일자리 중 상당수가 사라지고 새로운 직업이 많이 생겨날 것이라고 한다. 2019년 세계경제포럼(WEF)은 향후 5년 동안 85만 개의 직업이 사라지고 97만 개의 새로운 직업이 생길 것으로 전망했다. 2025년에는 분석적 사고, 창의성과 유연성이 있어야 하는 데이터·인공지능·콘텐트 제작·클라우드 컴퓨팅 관련 직업이 떠오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므로 재교육을 통해 종업원에게 새로운 기술을 가르치고(reskill) 숙련도를 높이는(upskill) 회사가 가장 경쟁력을 갖추게 될 것이라고 예견한다.

또 하나 지나칠 수 없는 사실은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가 된 오늘날 우리나라의 노사 분규는 여전히 끊이지 않고, 자살률은 2003년 이래 OECD 회원국 중 가장 높은 수준이라는 점이다. 무엇 때문일까?

경제 상황이 이렇게 나아진 지금도 인간을 생산요소로 보는 시각이 여전히 남아 있고, 이에 따른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경영학 이론에서도 과거의 기계적 인간관에서 인간의 사회적·심리적 요소를 중시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노사 분규나 자살률 문제도 결국은 경제 발전을 따라가지 못하는 사회적 인식 탓이 아닐까?

인적 자본에 기본 소양도 포함

이제는 인간을 생산요소로 보는 획일적 암기식 교육이 아니라 개인 차이를 존중하는 맞춤형 교육으로 전환해야 할 때다. 또 인간이 갖추어야 할 기본 소양인 예의·배려·염치 등도 가르치는 인성 교육에 관심을 쏟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적 자본의 개념을 생산성을 높여 경제 발전에 도움을 주는 기술이나 지식에 한정할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본 소양도 포괄하는 개념으로 확장해 보아야 한다는 의미다.

미래는 준비하는 사람의 몫이다. 이제부터라도 교육의 방향을 지식이나 기술에 더해서 리더십과 인성을 겸비한 인재를 양성하면서 노사 분규를 줄이고 높은 자살률도 떨어뜨릴 수 있게 획기적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코로나19가 가져온 뉴노멀(새로운 일상) 시대에 적합한 인적 자본 교육으로 경제 발전의 동력을 재충전할 것이 요청된다.

민주 사회에서 더불어 사는 지혜 길러야

1919년 미국에서 시작한 JA(Junior Achievement)는 청소년 대상의 세계 최대 비영리 교육기관이다. 청소년들에게 진로 지도, 경제·금융·기업가정신 등의 교육을 통해 어릴 적부터 인적 자본을 배양해 사회에서 성공적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는다.

JA코리아는 JA를 벤치마킹해 2002년 우리나라에 들여온 청소년 대상 비영리 교육기관이다. 지금까지 자원봉사자들을 통해 150만 명 이상의 청소년에게 무상 교육을 했다. 2014년부터는 IT 강국인 우리나라의 장점을 살려 디지털 리터러시(IT 해독능력) 교육도 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지난해에는 대면 교육이 쉽지 않았다. 고민 끝에 온라인 교육을 병행함으로써 어느 정도 돌파구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온라인 교육이 한계가 있는 만큼 각계 전문가 의견을 수렴해 유튜브·인스타그램 등 SNS 교육을 병행하자는 결론에 도달했다. 교육 내용도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지만, 삶에 꼭 필요한 덕목을 포함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인적 자본의 개념을 지식이나 기술에 한정하지 않고, 청소년들이 민주시민으로서 지녀야 할 기본 소양도 가르치자는 취지다.

과거 우리 교육이 노동력의 생산성 향상에 치중했다면 이제 인간 존중이나 예의·배려·염치 같은 기본 소양에도 관심을 가져야 할 때가 됐다. 자칫 경쟁만이 강조되기 쉬운 입시 제도 아래에서 민주 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서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함양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결혼하기 전에 배우자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을 배울 기회가 있는가? 자녀를 갖기 전에 부모 노릇을 어떻게 할까 고민한 적이 있는가? 이러한 덕목들은 진정한 의미의 인적 자본을 이루는 핵심 역량으로, 청소년뿐 아니라 기성세대에도 필요하다.

관건은 청소년들이 ‘듣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보고’ 배우는 만큼, 가르치는 기성세대의 솔선수범이 따라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기성세대의 어려운 숙제이기도 하다.

오종남 SC제일은행 이사회 의장·전 IMF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