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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성희의 퍼스펙티브

아동가족 업무 한데 모으고 성평등위원회 설치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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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출범 20년 여가부, 리셋이 필요하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여성가족부의 사정에 밝은 한 인사의 얘기다. “여가부를 보면 매 맞는 아내 증후군이 떠오른다.” 계속된 가정폭력에 저항 의지를 잃고 나중엔 아예 순치돼버리는 피해자 같은 정서가 조직 안에 팽배해 있다는 얘기다. “여가부가 잘못할 때도 많다. 하지만 여가부가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여건에도 주목해야하지 않나. 툭하면 동네북처럼 두들기기보다 권한과 힘을 주는 게 중요하다. 여가부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때”라고 그는 강조했다.

예산 권한 적은 초미니 여가부 #제대로 일하게 구조조정 필요 #성평등, 특정 부처 전유물 아냐 #국가 정책 전반에 반영되어야

여가부가 지난달 출범 20년을 맞았다. 사람으로 치면 성인식을 치른 셈이지만, 축하보다는 아쉬움의 목소리가 크다. 예산·권한이 적은 힘 없는 부처인 것을 고려해도, 미투 운동 이후 쏟아지는 여성과 가족 이슈에 대한 대응이 너무도 실망스럽기 때문이다. 줄기차게 ‘여가부 폐지’를 외치는 일부 남성들은 그렇다 쳐도, ‘이럴 거면 차라리 없느니 못하다’며 ‘여가부 무용론’에 손드는 여성들까지 나왔다. 김정재 국민의힘 의원실이 성인남녀 998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여가부가 잘못 운영되고 있다’는 부정적 의견이 72.3%에 달했다. 심지어 부정 평가가 남성(71.4%)보다 여성(74.3%)에서 높게 나타났다.

# 여가부의 배신

메인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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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청와대 게시판에 등장한 ‘여가부 폐지 청원’에 기름을 부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전직 이정옥 여가부 장관이었다. 박원순·오거돈 전 시장의 성폭력으로 치러지는 재보선에 대해 “국민이 성인지 감수성을 학습할 기회”라는 믿기 힘든 발언을 했다. 기독교 단체와 야당 의원이 “동성애 옹호, 조기성애화 우려”를 이유로 여가부의 ‘나다움 성교육 추천도서’에 문제를 제기하자, 단 한 차례 논박 없이 전격 회수를 결정했다. 웰컴투비디오 운영자 손정우의 미국 송환에 대한 법원의 불허 판결에도 무반응이었다.

사회학과 교수 출신인 이 장관은 애초부터 여성계에 낯선 인물이었다. 낙태죄 폐지를 반대하는 보수주의자로, ‘나다움책’ 회수 결정도 장관의 개인적 소신이 컸다는 후문이다. “성인지 감수성 집단 학습” 발언도 실언이라기보다는 “대통령을 지키겠다”는 ‘충정’이었다는 전언이다. 여성가족부 아닌 ‘여당가족부’라는 비아냥 속에,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자임한 문재인 정부의 이율배반을 확인시켰다. 문 대통령은 집권 초, 부적절한 성 인식으로 비판받은 탁현민 청와대 의전비서관의 경질을 건의한 정현백 여가부 장관을 경질한 바 있다.

무기력한 여가부에 대한 불만은 최근 ‘페미니즘 리부트’를 견인한 2030 여성들에게서 집중적으로 터져 나왔다. 기존 여성운동계와도 각을 세우는 영 페미니스트들이다. 아동학대나 입양, 저출산 문제, 낙태죄 폐지, 20대 여성 자살률 증가, 코로나와 여성 고용불안 등 쏟아지는 사회적 의제에도 여가부의 존재감은 없었다. 여가부는 지난해 정부 업무평가에도 최하위를 기록했다.

# 여가부의 사정

해외의 여성·성평등 부처?기구

해외의 여성·성평등 부처?기구

이처럼 ‘일잘못(일을 잘 못 하는)’ 여가부에도 할 말은 있다. 낮은 위상, 적은 예산과 규모다. ‘여성’하고도 ‘가족’부니 국민적 관심사와 사회 갈등을 전방위로 다루는 부처 같지만 대부분 타 부처와 업무가 겹치고, 권한도 적어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는 게 현실이다. 2021년 여가부 예산은 1조2325억원으로 정부 전체 예산의 0.2% 수준이다. 서울 강남구 한 해 예산(1조1278억원) 정도다. 인원도 267명인 초미니 부처다. 아동·저출산·돌봄은 보건복지부, 성폭력 피해자 지원은 법무부·경찰청, 청소년 정책은 교육부와 업무가 겹친다. 보육·입양은 복지부, 성별 임금 격차는 노동부, 성폭력은 경찰청· 법무부 관할이다. 성폭력 사건 조사권 같은 실질적 권한도 지자체에 위임돼 있다. 여가부 출신인 한 관계자는 “같은 아동학대 관련 업무라도 복지부는 6년간 담당자가 7번 바뀔 정도로 업무 강도가 높은데, 여가부는 꽃보직이다. 그만큼 여가부에 주어진 역할이 한가하고 제한적이란 뜻”이라고 전했다. 여가부 예산 60%를 차지하는 가족 업무는 주로 미혼모·한부모·다문화가정 지원에 치우쳐 있다. 2020년 저출산 예산도 복지부는 30%, 여가부는 2.5%로 노동부 8%보다도 적었다. 한마디로 ‘사실상 정책기획 업무만 할 수 있는데 권한 없이 책임만 지라는 부처’ ‘다 해야 하는데 할 수 있는 게 없는 부처’란 얘기다. 성차별과 성폭력 등 구조적 문제에 대한 종합 대책을 마련해야 할 국가가 “갈등이 터지면 여가부 뒤에 숨어 오히려 여가부를 총알받이 삼는다”(임윤옥 한국여성노동자회 자문위원)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 여가부의 리셋

이름 변천사

이름 변천사

여가부의 위상 강화를 위해 최근 주목받는 것이 성평등위원회 설치 안이다. 여러 부처로 흩어진 여성·가족 관련 업무를 한데 모아 업무의 집중도를 높이고, 모든 정부 정책에 성평등 기조를 반영하게 하는 독립기구를 별도로 두자는 것이다.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최근 “여가부는 실무적 행정기관으로 남겨두고, 대통령 직속 성평등위원회를 둬서 성평등 정책의 방향을 대통령과 함께 논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성평등은 특정 부처의 전유물이 아니라 국가 통치원리로 자리 잡아야 하고, 이를 위해 각 부처를 컨트롤할 수 있는 대통령이 직접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김정덕 ‘정치하는 엄마들’ 공동대표는 “성평등 이슈는 대통령 직속 성평등위원회를 둬서 대통령이 직접 챙기고, 여가부는 아동청소년가족부, 혹은 아동청소년부로 재편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여성과 가족을 묶어두고 특정 성별을 앞세운 부처 이름 때문에 불필요한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협소한 논의를 벗어나, 전 생애적 관점에서 모든 사람을 아우르자는” 얘기다. 현재 여가부의 영어명칭도 ‘성평등가족부(Ministry of Gender Equality and Family)’다. 가족 안에서도 약자인 아동·청소년 인권, 우리 사회 지속가능성과 직결되는 저출산, 가족해체 등의 이슈를 위해 부처 이기주의에 닫힌 사업들을 구조조정을 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반면 아직은 정부 부처의 공식 명칭에서 ‘여성’을 떼어낼 때가 아니라는 현실론도 있다.

물론 여기에는 부처 간 밥그릇 싸움이라는 민감한 문제가 있다. 그러나 툭하면 터져 나오는 ‘여가부 폐지론’을 잠재우고, 성평등이 단지 여성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차별을 없애는 것이며, 우리 사회 지속가능성의 근간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더는 미룰 과제가 아니다. 대통령 직속 성평등위원회는 문재인 정부의 국정과제이기도 하다. 청와대의 적극적인 정책 의지가 필요한 때다.

세계 97개국 여성 성평등 장관급 부처 있어

2001년 김대중 정부에서 탄생한 여성부는, 2005년 노무현 정부에 와서 여가부로 확대됐다. 여성부의 탄생은 1980~90년대 국내 여성운동과 1995년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유엔 제4차 세계여성대회(베이징여성대회)’ 등 국제사회의 흐름을 반영한 결과였다. 두 진보 정권 아래에서 호주제 폐지, 성매매 방지 특별법 제정 등 굵직한 성과가 나왔다. 이명박 대통령은 인수위 때부터 여가부 폐지를 주장했다. 2008년 여성부로 축소됐다가 2010년 다시 여가부가 됐는데, 이때 복지부로부터 가족 업무를 이관받으며 핵심인 보육을 뺀 틈새적 업무만 건네받았다.

부처의 부침 만큼 반대 세력의 악의적 공격도 많았다. 일부 남성들은 여전히 ‘여가부=여성만을 위한, 역차별부’라고 주장한다. ‘여가부=젠더 갈등의 온상’이라는 프레임이다. 2011년 자정 이후 청소년 게임을 규제하는 셧다운제는 문체부와 여가부가 함께 폈지만, 비판은 여가부에 집중됐다. 여가부가 생기기 전 ‘군 가산점 위헌 결정’(1999년)도 ‘여가부 만행’ 리스트에 올라있다.

외국에는 여가부 같은 여성 정책 부서가 없다는 주장도 있지만, 사실은 정 반대다. 2020년 5월 기준 여성·성평등 장관급 부처가 있는 나라는 영국·캐나다(여성·성평등부), 독일(가족노인여성청년부), 스웨덴(성평등부), 이탈리아(평등가족부) 등 97개국이다. 미국(세계여성이슈사무소), 프랑스(총리 직속 양성평등 사무국), 일본(내각 소속 성평등국), 중국(국무원 부녀아동업무위원회) 등은 장관급 이하 여성·성평등 부처·기구를 두고 있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