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심심한 위로, 몰랐다”던 서울시, 6개월만에 첫 “사과·책임” 언급

중앙일보

입력

고(故)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희롱 사건과 관련, 서울시가 6개월 만에 처음으로 사과했다. 지난해 7월 박 전 시장의 극단적 선택과 함께 사건이 불거지자 “철저한 진상규명에 나서겠다”, “사건 관련 내용을 보고받은 바 없다”고 해명했을 뿐 책임을 명시적으로 언급한 적은 없었다.

“인권위 조사결과, 겸허히 수용…피해직원, 시민께 사과”

26일 오후 3시 서울시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전 서울시장 성희롱 등 직권조사 결과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희롱 사건의 피해 직원과 가족, 시민에게 사과했다. [서울시]

26일 오후 3시 서울시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전 서울시장 성희롱 등 직권조사 결과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희롱 사건의 피해 직원과 가족, 시민에게 사과했다. [서울시]

26일 서울시는 ‘인권위 직권조사 결과를 겸허히 수용하고, 재발방지대책을 적극적으로 시행해 나가겠습니다’라는 제목의 입장문을 내고 피해자 A씨와 가족, 시민에게 사과했다. 서울시는 “서울시는 이번 사건의 책임 있는 주체로서 인권위 조사 결과를 반성과 성찰의 자세로 겸허히 받아들인다”며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계신 피해 직원과 가족, 큰 심려와 실망을 안겨드린 시민께 정중히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서울시의 사과와 책임 언급은 박 전 시장 사망 후 처음 있는 일이다. 박 전 시장이 사망한 지 닷새 후인 지난해 7월 15일, 서울시는 브리핑을 열고 “피해를 호소한 직원의 고통과 아픔에 공감하며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고 했지만 사과나 책임이라는 단어는 쓰지 않았다. “서정협 권한대행은 비서실장 재직 당시 이번 사안과 관련한 어떤 내용도 인지하거나 보고받은 바 없다”며 해명에 초점을 뒀다.

박 전 시장 유고 닷새 후인 지난해 7월 15일황인식 서울시대변인이 시청 브리핑룸에서 직원 인권침해 진상 규명에 대한 서울시 입장발표하고 있다. [뉴스1]

박 전 시장 유고 닷새 후인 지난해 7월 15일황인식 서울시대변인이 시청 브리핑룸에서 직원 인권침해 진상 규명에 대한 서울시 입장발표하고 있다. [뉴스1]

편지·실명공개…서울시, “소모적 논쟁 멈춰 달라” 

그러나 이번 입장문에선 사과와 함께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도 멈춰줄 것도 당부했다. 서울시는 “인권위 조사 결과가 나온 만큼 피해자에게 상처를 더하는 2차 가해와 소모적 논쟁을 중단해 줄 것을 간곡히 요청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박 전 시장의 지지자로 추정되는 2명이 회원 1000명이 넘는 네이버 밴드에 피해자의 실명을 공개하는 등 2차 가해가 빈번했던 탓이다.

특히 민경국 전 서울시 인사기획비서관과 오성규 전 서울시 비서실장은 지난해 12월 A씨가 박 전 시장에게 쓴 자필 편지를 공개하기도 했다. 당시 이를 두고 “A씨와 박 전 시장이 친밀한 사이였기 때문에 성추행이 아니다”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또 피해자 편지를 공개하는 과정에서 A씨의 실명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게재한 김민웅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가 경찰에 고소되는 일도 벌어졌다.

서울시 쇄신 돌입…“지자체장 성폭력→여가부→외부기관 대응”

서울시가 지난해 12월10일 발표한 성차별ㆍ성희롱 근절 특별대책의 일부. 외부 권익조사관을 채용하고 지자체장에 의한 성폭력은 경찰, 인권위가 조사하도록 매뉴얼을 만들었다. [서울시]

서울시가 지난해 12월10일 발표한 성차별ㆍ성희롱 근절 특별대책의 일부. 외부 권익조사관을 채용하고 지자체장에 의한 성폭력은 경찰, 인권위가 조사하도록 매뉴얼을 만들었다. [서울시]

서울시는 “인권위 조사결과를 쇄신의 계기로 삼아 재발 방지에 만전을 기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 “성차별·성희롱 근절 특별대책을 차질 없이 시행하는 한편, 추가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약속도 내놨다. 서울시는 “피해자가 다시 평온한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피해 직원의 의사를 최우선으로 하는 보호 방안을 마련하고, 2차 피해 방지를 위한 구체적인 대책을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서울시는 지난해 12월 10일 ‘성차별·성희롱 근절 특별대책’을 발표하는 등 관련 제도를 정비 중이다. 기존 여성권익담당관과 인권담당관, 조사담당관, 인사과 등 4개 부서에서 나눠 처리하던 성희롱·성폭력 사건을 여성권익담당관으로 일원화해 신속히 대응하기로 했다. 또 지자체장에 의한 성폭력 사건인 경우, 인지 즉시 여성가족부에 알려 경찰, 인권위 등이 조사할 수 있게 하기로 했다. 외부 기관이 조사할 경우 ‘피해자에 대한 심적 압박을 가하지 않는다’ 이유로 내부 사건 처리 절차를 멈췄던 기존 관행도 개선키로 했다.

피해자, “현장 실효성 있어야”…오 전 비서실장, “유감”

서울시장위력성폭행사건공동행동 회원들이 25일 오전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인권위가 정의로운 권고를 내려달라"며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뉴시스]

서울시장위력성폭행사건공동행동 회원들이 25일 오전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인권위가 정의로운 권고를 내려달라"며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뉴시스]

 피해자 측은 보다 실효성 있는 대책을 강조했다. ‘서울시장 위력성폭력사건 피해자 지원단체’는 지난 25일 “2019년 여성폭력방지기본법에서 2차 피해 명시와 예방조치가 의무화됐지만, 현장에서 작동하지 못하고 있어 실효성 있는 이행이 필요하다”며 “(인권위가 예시로 든) ‘대한민국시·도지사협의회 자율규제’는 실효성이 있는 권고는 아닐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같은 날 오성규 전 서울시 비서실장은 인권위 조사 결과에 대해 “유감”을 밝혔다. 오 전 비서실장은 “피조사자가 방어권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수사권이 없는 인권위가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기 어려운 한계를 드러낸 것으로 본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허정원 기자 heo.jeongwo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