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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스·마린·나경원…여성 정치인과 패션의 만남은 왜 늘 공격 받을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 10일 미국 최초의 여성 부통령이자, 아프리카-아시아계 부통령으로 주목받던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 당선인은 유명 패션지 ‘보그’ 2월호 표지에 나온 뒤 한 순간에 논란의 중심에 섰다. 사진을 본래 피부색보다 의도적으로 햐얗게 보정했다는 이른바 ‘화이트워싱’ 의혹이 제기되며 인종차별 이슈가 불거진 것이다.

미국 역사상 첫 여성 부통령이자 유색인종 부통령에 당선된 카멀라 해리스. 지난 10일 공개된 보그 2월호 표지서 화이트 워싱과 격식을 차리지 않은 패션으로 논란이 됐다. 사진 미국 보그 홈페이지

미국 역사상 첫 여성 부통령이자 유색인종 부통령에 당선된 카멀라 해리스. 지난 10일 공개된 보그 2월호 표지서 화이트 워싱과 격식을 차리지 않은 패션으로 논란이 됐다. 사진 미국 보그 홈페이지

여성 정치인과 패션, 그 논란의 역사

카멀라 해리스의 경우 처음엔 피부색이 문제였지만 나중엔 옷차림도 도마 위에 올랐다. 주름 잡힌 바지와 컨버스 운동화를 신고 서 있는 포즈가 지나치게 캐주얼하고 여성 지도자의 격에 맞지 않는다는 혹평이 일었다. 이에 대해 안나 윈투어 보그 편집장은 “격식을 덜 차린 모습이 오히려 코로나 19로 힘든 시기를 보내야 하는 현실을 잘 반영한다”고 해명하며 논란은 일단락됐지만 결과적으로 해리스는 별다른 긍정적 효과를 얻지 못했다.

스웨덴 여성 총리 산나 마린은 가슴골이 드러나는 '클리비지 룩'으로 인터뷰에 등장해 화제가 됐다. 사진 트렌디 매거진 인스타그램

스웨덴 여성 총리 산나 마린은 가슴골이 드러나는 '클리비지 룩'으로 인터뷰에 등장해 화제가 됐다. 사진 트렌디 매거진 인스타그램

지난해 10월에는 핀란드 여성 총리 산나 마린이 ‘클리비지 룩(cleavage look, 가슴 사이가 깊게 파인 옷차림)’으로 구설에 올랐다. 역시 패션지 ‘트렌디’에 가슴골이 노출된 사진으로 등장했는데 이를 두고 “정치인의 신뢰를 깎아 먹는 옷차림”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이번엔 “여성 정치인의 패션에 대해 가부장적 시선을 깨는 시도”라며 마린 총리를 지지하는 여성들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인스타그램에 비슷한 클리비지 룩 사진을 올리며 해시태그 ‘#imwithsanna(산나를 지지한다)’를 달았다. 그럼에도 마린 총리의 인터뷰 자체는 옷차림만큼 주목받지 못했다.

외모 논란 속 지워지는 메시지

지난 2009년 나경원 전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패션지 '엘르'의 화보에 등장한 모습. 중앙포토

지난 2009년 나경원 전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패션지 '엘르'의 화보에 등장한 모습. 중앙포토

가까운 일본에선 2010년 렌호 일본 전행정쇄신상이 ‘보그 재팬’에 등장해 국회의사당을 배경으로 인터뷰 화보를 게재했다 홍역을 치렀다. 발렌티노·아르마니·랑방 등 지나치게 고가의 의류를 입은 게 문제였다.
한국에서도 지난 2009년 나경원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패션지 ‘엘르’에 등장한 적이 있다. 나 의원은 ‘대한민국 파워우먼의 초상’이란 주제로 드라스 반 노튼의 검정 블라우스에 랄프 로렌의 롱스커트를 입고 화보를 찍었는데 사진이 공개된 후 ‘한나라당이 4·29 재보선에서 패했는데 부적절하다’는 비판이 거셌다. 정치인으로서 밝힌 소신과 사명감, 화보 속 액세서리 판매 금액의 20%를 아동기관에 기부한다는 점 등은 논란 속에 묻혀버렸다.

해외 여성 정치인들은 패션지 커버에 등장하는 경우가 잦다. 왼쪽부터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미 하원의원, 사라 페일린 전 알래스카 주지사,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 당선인,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 사진 각 사

해외 여성 정치인들은 패션지 커버에 등장하는 경우가 잦다. 왼쪽부터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 미 하원의원, 사라 페일린 전 알래스카 주지사,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 당선인,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 사진 각 사

소탈함 보여주는 예능 선택하기도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한 나경원 전 국민의 힘 의원은 지난 5일 TV 조선 예능 프로그램 '아내의 맛'에 출연했다. 사진 아내의 맛 방송 캡처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한 나경원 전 국민의 힘 의원은 지난 5일 TV 조선 예능 프로그램 '아내의 맛'에 출연했다. 사진 아내의 맛 방송 캡처

이에 따라 한국에선 패션지 대신 예능 프로그램 출연을 선택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최근 나경원 전 국민의힘 의원과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예능 프로그램 ‘아내의 맛’에 출연한 것이 대표적이다. 잡지 출연과 예능 출연은 둘 다 대중적 행보지만 예능 쪽이 더 소탈한 모습을 보일 수 있어 선호된다. 정치인으로서가 아니라 가정의 구성원으로서 인간적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있다.

서울시장 출마를 앞둔 박영선 장관 역시 지난 12일 '아내의 맛'에 출연했다. 사진 아내의 맛 방송 캡처

서울시장 출마를 앞둔 박영선 장관 역시 지난 12일 '아내의 맛'에 출연했다. 사진 아내의 맛 방송 캡처

전문가들은 패션지의 경우 매체의 특성상 신뢰감과 유능함이 우선시되는 정치인과 잘 맞는 궁합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특히 여성 정치인의 경우 옷차림과 화장 등 겉으로 드러나는 외모 자체가 논란의 빌미가 되기 십상이다. 일례로 지난해 8월 류호정 정의당 의원은 붉은 원피스를 입고 국회에 나섰다가 정치인의 격에 맞지 않는다며 뭇매를 맞기도 했다. 힐러리 클린턴도 2016년 4월 미국 대선 경선 당시 1400만원 대 조르지오 아르마니 코트를 입었다가 도마 위에 올랐다.

논란의 빨간 원피스를 입은 류호정 정의당 의원. 이후에도 청바지와 작업복, 노란색 원피스 등 기존 국회의원의 옷차림과 다른 파격적 스타일로 화제가 됐다. 중앙포토

논란의 빨간 원피스를 입은 류호정 정의당 의원. 이후에도 청바지와 작업복, 노란색 원피스 등 기존 국회의원의 옷차림과 다른 파격적 스타일로 화제가 됐다. 중앙포토

힐러리 클린턴 미국 전 국무장관은 고가의 재킷을 입고 연설을 해 구설에 오른 적 있다. 연합뉴스

힐러리 클린턴 미국 전 국무장관은 고가의 재킷을 입고 연설을 해 구설에 오른 적 있다. 연합뉴스

반면 남자 정치인은 외모 논란에서 비껴가는 경우가 많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만 해도 수백만 원대 브리오니 정장을 즐겨 입지만 이슈가 된 적은 거의 없다. 김은주 한국여성정치연구소 소장은 “여성 정치인은 남성보다 훨씬 자주 ‘무엇을 입었는지’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며 “그로 인해 정치인으로서의 전문성이나 핵심적 메시지가 지워지는 것은 불합리하고 시대정신에도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여전히 패션이 메시지를 전달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정치인은 늘 공개적으로 자기표현을 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패션은 가장 기본적이고 유력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정연아 사단법인 이미지컨설턴트 협회장은 “정도를 지키는 선 안에서 패션은 정치인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요소”라며 “깔끔한 스타일의 남성 정치인들은 유능한데다 패션 센스까지 더했다고 호감을 얻지 않나”라고 말했다. 그는 “여성 정치인에 대한 차별적 시선과 이중 잣대가 문제지 정치인이 패션을 활용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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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연 기자 yoo.jiyo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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