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사회에 짐이 될 '조기 퇴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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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미국에 다녀왔다. 미국인들의 한국에 대한 시각이 근본적으로 변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북한의 '미녀 응원단'에 환호하며 미국 선수단에는 야유를 보내는 것을 보며 미국 사람들은 이제 한국과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는 것 같았다. 앞으로 세계 초강대국이 된 미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끌고 나갈지, 그리고 아이들에게는 미국과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우리 지도층이 당면한 과제가 보통 일이 아님을 느끼게 했다.

또 하나 이번 여행을 통해 새삼스럽게 느낀 점은 미국에는 왕성하게 활동하는 노년층이 매우 많다는 것이었다. 우선 미국 국민이 매일 시청하는 3대 TV 방송의 저녁 메인 뉴스 프로그램의 앵커맨은 모두 60세가 넘은 '노인'들이었다.

CBS에는 73세의 댄 래더가 필자가 유학생이었던 1970년대부터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ABC의 피터 제닝스, NBC의 톰 브로코도 모두 60대의 '노인'들로서 같은 자리를 20년 넘게 지키고 있었다. 내각에도 70대의 럼즈펠드 국방, 미네타 교통, 페이지 교육부 장관, 그리고 60대의 파월 국무, 스노 재무, 애슈크로프트 법무 등 주요 직책은 대부분 60대 이상 '노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미국 상원은 1백명 의원 중 54명이 60세 이상 '노인'이었고 재계에도 한.미 재계회의 미국측 의장을 맡고 있는 78세의 그린버그 AIG 회장을 비롯해 많은 '노년의 인사'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점점 많은 노인이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하게 되는 것은 사회가 노령화하면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노령화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우리나라에서는 거꾸로 장년층의 조기 퇴직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56세를 넘어서도 일하고 있으면 도둑(오륙도)'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생겨났다.

97년 외환위기 이후 나타난 현상이지만 '젊은' 노무현 정부 출범과 아울러 세대교체 바람은 더욱 강하게 불고 있다. 현재 우리 내각에는 대통령 직속 18개 부처의 장관 중 만 60세 이상 장관은 국방부장관 단 한명 뿐이다.

각 당에서는 내년 선거를 앞두고 소위 60세 이상 '노인' 정치인들에 대한 퇴진 움직임이 만만치 않다. 금융기관에는 이미 50대 중반 이상의 직원들을 찾기 어려워졌다. 최근 한 주요 일간지의 새로운 '칼럼' 필진을 보니 12명 중 11명이 51세 이하였다. 매우 우려되는 현상이고 한치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정책들이다.

퇴직한 노인들을 부양하는 부담은 젊은이들에게 곧 어떤 형태로든 돌아올 것이다. 세금도 급격히 증가할 것이고 사회보장 부담도 크게 늘 것이다. 무엇보다 '노는' 젊은 노인들의 급격한 증가로 사회는 활력을 잃을 것이고 해결되지 않는 청소년 실업과 아울러 소비가 활성화하기 어려워 경제 회복이 쉽지 않을 것이다.

미국에서도 경기가 회복국면에 들어섰다는데 새로운 일자리는 계속 줄어들고 있다. 소위 '고용 창출 없는 경기회복'이라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기업들은 보다 저렴한 생산기지와 '서비스 센터'를 찾아 중국이나 인도로 생산시설이나 기업의 기능 일부를 이전하고 있고 인터넷의 발달로 노동력 소요는 더욱 줄어들고 있다. 우리나라는 이에 더해 노동시장까지 유연하지 못해 기업들의 고용 의지를 더욱 위축시키고 있다. 한마디로 앞으로 새로운 일자리 창출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노조는 임금 인상보다 고용 유지에 힘써야 한다. 일자리보다 더 중요한 복지가 있을 수 없다. '임금의 지속적 인상'은 곧 '대다수 고용 기회 상실'이라는 부메랑이 돼 돌아올 것이다. 기업들도 사람을 함부로 잘라서는 안 된다.

모두 일용직.임시직으로 채워 가지고서야 어찌 장기적으로 경쟁이 가능하겠는가? 정부도 너무 젊은 사람 위주로 국정을 운용하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 정부의 인사정책이 민간부문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큼을 인식해야 한다. 진정한 복지사회는 노.장.청년층이 모두 조화롭게 사회에서 활동할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구본영 前 대통령 경제수석 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