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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성락 "한국 외교, '5대 수렁'에서 벗어나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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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성락 전 주러시아 대사가 지난 4일 오전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위성락 전 주러시아 대사가 지난 4일 오전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북핵 협상을 진두지휘했던 위성락(사진) 전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ㆍ주러시아 대사가 한국 외교가 거듭나야 할 길에 대한 제언을 담은 책을 펴냈다. 36년 동안 외교 현장을 누볐던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 외교의 맹점을 지적하고, 2016~2020년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대북 협상 및 4강 외교가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

<한국 외교 업그레이드 제언> 신간 발간 #'5대 수렁'은 자기 중심적 관점, 국내정치 종속 #이념성과 당파성, 포퓰리즘, 아마추어리즘 등

"정치적 목적 위해 대외관계 이용" 외교개혁 절실

위 전 대사는 지난달 30일 발간한 저서 〈한국 외교 업그레이드 제언〉에서 "자기 중심적·감정적 관점, 국내 정치에 종속된 외교, 이념성과 당파성, 포퓰리즘, 아마추어리즘 등 5가지는 한국 외교의 5대 수렁"이라며 "한국 외교 생태계의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위 전 대사는 한국에서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외교를 이용하는 일이 빈번하다고 지적하며, 사회가 이념적으로 갈리다 보니 외교까지 '친미·동맹 중심, 국제중심적 접근'과 '다소 반미·친중 성향, 남북관계 중심적 접근'으로 이분화됐다고 분석했다.

특히, 외교적 포퓰리즘은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 미·중 사이의 노선 설정 등의 이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는 게 저자의 인식이다. 외교가 포퓰리즘에 집착하다 보니 외교 전문가의 입지가 줄어드는 아마추어리즘까지 생긴다고 분석했다.

위 대사는 "한국과 같은 난해한 지정학적 위치에 있는 나라는 외교가 국가의 존망을 좌우할 수도 있지 않은가"라며 "정치권·언론·시민단체 등의 의식 있는 인사들이 연대해 초당적, 탈이념적, 국익 위주의 외교 정책 담론을 적극적으로 제기하는 것도 유용할 것"이라고 제언했다

북핵 협상에 "제재·압박은 비핵화 수단일 뿐"

국내 최고의 북핵 전문가라고 불리는 경력에 기반해 최근 수년간 진행된 북핵 외교에 대한 평가도 이어졌다.

위 대사는 북한이 2017년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자신들의 '외교 대첩'으로 여기고 있다고 봤다. 그는 "정상회담을 앞두고 판문점에서 6차례 문안 협상을 했으며, 그것으로 모자라 회담 당일 새벽까지 싱가포르에서 문안 조정을 했다"며 "그러나 북한은 비핵화의 개념에 대한 기존 입장을 지켜냈고, 자기식의 비핵화 접근 방법에 대한 미국의 동조까지 얻어냈다"고 평가했다. 치열한 담판 끝에 원하는 합의문을 만들었으니 북한으로서는 외교 대첩으로 여길 만하다는 것이다.

위성락 전 주러시아대사의 신간 '한국 외교 업그레이드 제언'. [21세기북스 캡처]

위성락 전 주러시아대사의 신간 '한국 외교 업그레이드 제언'. [21세기북스 캡처]

위 전 대사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이 2018년 하노이 정상회담 결렬로 성과를 보지 못한 시점에서 미국과 북한은 모두 기존 입장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그는 "북한은 싱가포르 합의를 승리라고 보는 집착을 버리고, 미국은 실패한 하노이 회담 제안에 유연성을 부여해야 할 때"라고 했다.

한국에 대해서는 "중국과 러시아의 심리에 유의하면서, 미·중 경쟁이나 미·러 대립의 주술이 북핵에 미칠 영향은 최소화하고, 북핵의 문제점과 국제적 책임을 설득하는 쪽이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위 전 대사는 이어 대북 제재와 압박은 목적이 아닌 수단임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는 "우리가 제재·압박을 추구하면서도 언젠가 재개될 협상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라며 "제재·압박은 수단이며, 진정한 목적은 이를 통해 본질적으로 비핵화를 할 수 있는 협상을 유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지금까진 트럼프에 의존, 이젠 정책에 의존해야" 

위 전 대사는 2016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 이후 급변했던 한반도 정세를 설명하며 4강 외교에 대한 제언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미국의 정책 중심이 하나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며 "미국에는 트럼프의 관점이 있고, 관료의 관점이 있다"고 했다. 그동안 한국이 트럼프 대통령에 크게 의존해 왔다면, 이젠 트럼프 이외의 정책 중심과 교감을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4강이 복잡하게 얽힌 사드 배치 문제에서도 "우리가 논의를 주도하지 않고 미국에 끌려가는 모습을 보이면, 중국과 러시아는 이것이 한국의 안보 이슈가 아니라 미국의 전략적 정책 이슈라고 확신하게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위 전 대사는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36년 동안 외교 현장에 있으면서 정책·전략보다는 행정·의전에 머물러 있는 외교 현실에 대한 개혁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며 "마침 2016~2020년은 북핵 위기가 최고조로 올라갔다가 미·북 정상간 담판으로 큰 역사적 기회를 맞았고, 미·중 관계와 미·러 관계는 역사상 최저점의 시기였다. 이 과정의 교훈을 책으로 정리하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저자는 외교부 북미국장과 주미대사관 정무공사, 북핵 6자회담 수석대표인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등을 거쳐 주러 대사를 마지막으로 지난 2015년 퇴직했다. 이후 강의와 언론 기고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김다영 기자 kim.dayou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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