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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술 '청주' 기행

중앙일보

입력

지난달 27일 일본 이바라키현 이시오카시에 있는 후쥬슈조(府中酒造)주식회사의 술 제조장.

두툼한 작업복을 입은 6명이 양 소매를 걷어부치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쌀이 듬뿍 담긴 큼지막한 바구니를 차가운 물에 담가 놓고 두 사람씩 마주 서서 양손으로 위 아래 쌀을 빠르게 섞어가며 씻고 있다.

"조도 잇푼데스(정확히 1분입니다), 하야쿠 하야쿠(빨리 빨리)."

스톱워치를 들고 있던 사람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쌀을 씻던 사람들은 씻던 쌀의 물을 빼고 커다란 가마솥으로 옮겨 담는다. 이같은 작업은 가마솥에 쌀이 충분히 담길 때까지 계속된다.

"우리 양조장의 술 담그는 쌀은 물을 빨아들이는 능력이 뛰어납니다. 바싹 마른 스펀지라고 할 정도죠. 그런데 쌀이 물을 너무 많이 흡수하면 발효과정에서 당화(糖化)가 빠르게 진행돼 술의 품질이 떨어집니다. 술의 품질을 위해선 쌀을 씻을 때부터 초(秒)단위로 작업 시간을 다뤄야 합니다."

초시계를 들고 작업을 지시하던 야마우치 다카아키 사장의 설명이다.

찬바람이 부는 겨울날 퇴근길에 우리에게 '따뜻한 정종 한잔'의 유혹으로 다가오곤 하는 일본술 청주(淸酒). 일본 현지에서 만난 청주는 우리 나라에서 흔히 맛보는 대폿집의 '정종'이 아니었다.

우리 나라에서 요즘 한참 인기 높은 와인 이상의 대접을 받는 고급 술.멋쟁이 술로 변해 있었다.

이같은 일본 청주의 업그레이드는 후주슈조에서처럼 술 만드는 과정부터 남다른 정성을 담는 데 힘입은 것이다.

후주슈조는 1년에 8백만석(1石=1백80ℓ)을 생산하는 중소 양조장. 1854년부터 1백50여년 동안 '후주호마레(府中譽)'란 상표로 청주를 빚어 온 명문 양조장이다. 사장인 야마우치는 창업주의 8대손. 14년 전 가업에 뛰어든 그는 사라져가는 쌀종자를 살려내 고품질 청주를 새로 만들어낸 인물이다.

"니가타의 고구만세기(五百萬石)나 나카노의 미야마시키(美山錦)처럼 좋은 술맛을 내는 쌀이 이바라키현에는 없더라고요. 그러나 이곳저곳 자료를 찾아보니까 '와타리부네(渡船)'란 술 쌀이 메이지 시대에 재배됐던 기록이 있더군요."

이같은 사실을 알아낸 야마우치는 한 줌도 안되는 14g의 와타리부네 종자를 간신히 구한다.

"와타리부네 쌀은 술 담그는 쌀이지 밥 짓는 쌀이 아니지요. 술맛은 좋지만 밥맛은 엉망인 쌀이거든요. 처음엔 재배 농가를 구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고, 쌀을 수확하자 술이 빚어지지 않아 한동안 애를 먹었습니다."

와타리부네 종자를 손에 쥔 지 3년뒤에야 첫 술을 빚어낸다. 8년째 되던 해에는 와타리부네로 담근 청주가 전국 신주(新酒)평가회에서 금상을 받는 쾌거를 이룬다.

야마우치는 "이전에 쓰던 쌀도 손색이 없지만 와타리부네로 담근 청주가 더 오묘한 맛과 향을 내는 것을 심사위원들이 인정한 것 같다"고 말했다.

후주슈조의 경우처럼 양조장의 주인이 대를 이어가며 청주를 빚는 곳이 이바라키현에만 43곳. 일본 전국적으로는 2천여개 양조장이 맛있는 청주 빚기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렇게 빚어진 청주를 즐기는 층은 의외로 20~30대 젊은 남녀다. 술 판매점이나 술집에서 와인이나 위스키 못지 않은 고급 술로 대접받는다.

지난달 27일 오후 8시 이바라키현 류가사키시 사누키 거리에 위치한 선술집 '가부토'.

테이블마다 젊은 남녀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술을 마시고 있다. 나이든 사람도 틈틈이 끼여 있다. 그들 앞에 놓인 술은 하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데운 청주가 아니다. 술병과 술잔에 이슬이 맺힌 차가운 청주다.

가부토의 주인 오리하라 유타카는 "5~6년 전만 해도 나이든 남자들이 자주 들러 주로 값싼 대량 생산 청주를 데워 마셨으나 요즘은 20~30대 젊은이들이 와서 고급 청주를 찾는데 그 중에는 여자들도 많다"고 말했다.

류가사키시 시내에서 술 도매상을 하는 이이노 마사오는 "루이 뷔통이나 에르메스를 좋아하는 30대 패션 리더들이 청주의 새로운 소비층"이라며 "이들은 몇년 전만 해도 와인을 마시며 멋을 부리던 계층"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젊은 사람들 중에는 와인 동호회처럼 청주 동호회에서 활동하는 이들도 많다고 전했다. 자신이 참여하는 '환상적인 일본주를 마시는 모임'의 경우 30여명의 회원이 있는데 평균 나이는 서른 정도며 30%가 여성이라는 것.

특히 한국.미국에서 온 외국인 회원도 참가해 한달에 한번씩 일본인과 함께 청주를 즐긴다고 한다.

일본 생활 13년차인 오창익씨는 "고급 청주의 맛과 향은 와인에 비할 수 없을 만큼 깊고 오묘하다"며 "쌀이 주식인 한국 음식엔 쌀로 빚은 청주가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알코올 도수(15~19도)가 낮은 것도 그가 청주를 즐기는 이유란다.

오씨는 "양조장의 고품질 노력과 슬로 푸드를 선호하고 전통 음식을 추구하는 일본의 음식 경향에 힘입어 일본 청주가 급격히 발전하고 있다"며 "음식문화가 비슷한 한국에서도 일본 청주가 머잖아 와인 못지않게 각광을 받을지 모른다"고 했다.

<사진 설명 전문>
요즘 일본에서는 대기업이 대량 생산하는 청주보다 중소 양조장에서 정성스럽게 빚어내는 고급 청주가 인기다. 가격은 다소 비싸지만 오묘한 맛과 향으로 젊은층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사진은 멸종위기의 술쌀을 되살려 빚어낸 '와타리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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