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에세이] 영국 장원의 酒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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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하순 업무와 관련해 프랑스와 영국에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런던에서 일정을 마친 일행은 마침 귀국하는 비행기편까지 시간이 좀 남아서 옥스퍼드를 방문했다. 옥스퍼드 대학의 분위기와 코츠월드의 전원 풍경을 보는 것으로 여행을 마무리하자는 생각에서였다.

길이 막히지 않는 바람에 여유 시간이 좀 더 생긴 우리 일행은 옥스퍼드로 가는 도중 장원(莊園) 한군데를 더 방문하기로 예정을 바꾸었다.

잉글랜드 특유의 완만한 평야를 한참 달리다보니 높은 언덕과 마주쳤고 울창한 거목으로 뒤덮인 언덕 기슭에는 장중한 철문 만이 눈에 띄었다.문을 통과한 후 한참만에야 도착한 언덕 위에는 아름다운 장원 건물이 우뚝 서 있었다.

프랑스 루아르 지방의 샹보르성을 닮은 이 프랑스 르네상스식 건물이 롯실드가(家)에서 19세기 후반에 건립한 와데스돈 장원이었다. 롯실드가는 세계적인 대재벌로서 역사적으로 와인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늦은 시간이라서 본관을 둘러볼 순 없지만 지하의 와인 저장고는 관람할 수 있다는 직원의 설명에 우리 일행은 별도의 입장료를 지불하고 석회암으로 된 지하로 내려갔다.

와인 저장고의 두꺼운 문이 열리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방향(芳香)이 풍겨져 나왔다. 오래된 좋은 와인만이 내뿜는 고귀한 향으로서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저장고 안의 와인이 어떤 상태인지를 짐작하게 했다.

저장고 중앙에는 대리석으로 조각된 주신(酒神) 바커스의 입상이 놓여있고 양쪽 방의 와인렉에는 얇은 먼지로 덮인 와인이 빈틈없이 눕혀져 있었다.

숙성된 샤토 무통 롯실드를 비롯해 주로 보르도의 고급 와인들이 즐비하게 놓여져 보는 이의 넋을 잃게 할 정도였다. 와인 저장고를 나온 다른 일행들은 와데스돈 장원의 맑은 공기를 즐기고 있었지만 나는 저장고 안에 가득했던 와인 향기에서 오랫동안 헤어날 수가 없었다.

와인의 왕국이라 할 수 있는 프랑스에서는 일찍이 와인이 지니고 있는 재배지역 고유의 가치를 법률로 보호하자는 차원에서 다음과 같이 네 단계로 분류해왔다.

일상적으로 소비되는 와인으로서 산지명(産地名) 기재 등의 통제를 받지 않는 뱅 드 타블르(Vin de Table), 특정지역의 포도만을 사용함으로써 포도 산지가 표시되는 뱅 드 페이(Vin de Pays), 상급의 지정 와인으로 지정지역의 보증이 있는 VDQS 와인, 1935년의 원산지 호칭통제법에 의해 재배지역.품종.재배방법.생산량.당도.알코올함유도.양조방법 등에 엄격한 규제를 받는 최상급의 AOC 와인 등이다.

뱅 드 타블르와 뱅 드 페이는 일반 와인, VDQS 와인과 AOC 와인은 고급 와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가 수입해서 일상적으로 접하는 와인은 대부분 AOC 와인으로서 원산지와 품질상의 특성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보르도에선 1935년의 원산지 호칭 통제법이 도입되기 훨씬 전인 1855년부터 메독 지구에서 레드 와인을 생산하는 샤토 61개를 다섯 등급으로 구분해 지정해왔다.그중 다섯개의 샤토 와인이 최상급인 제 1급으로 지정된다.

앞서 언급한 롯실드가 소유의 샤토 라핏트 롯실드와 샤토 무통 롯실드가 바로 제 1급에 포함돼 있다. 유럽 상류사회의 최상급 와인에 대한 애착의 소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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