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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대 연봉보다 삶의 질?…코로나에 '실리콘밸리 엑소더스'

중앙일보

입력

빅테크 기업을 버리고, 실리콘밸리를 떠나는 인재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AFP=연합뉴스

빅테크 기업을 버리고, 실리콘밸리를 떠나는 인재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AFP=연합뉴스

미국 중서부 유타주의 친환경 스타트업 75F의 창업자 데핀더 싱은 지난 5월 눈을 의심했다. 페이스북ㆍ테슬라 같은 내로라하는 실리콘밸리 기업 경력자들이 구직 e메일을 보내와서다. 싱은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내게 사직서를 내고 실리콘밸리로 이직하는 경우는 있어도 반대 경우는 (2012년) 창업 후 처음”이라고 말했다.

'실리콘밸리 엑소더스'는 75F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콧대 높던 실리콘밸리 엘리트의 삶의 기준이 바뀌며 생기는 이런 흐름의 대표적인 사례일 뿐이다. 실리콘밸리 엘리트의 생각을 바꾼 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의 중심 도시 새너제이를 멀리서 본 전경. [사진 위키피디아]

미국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의 중심 도시 새너제이를 멀리서 본 전경. [사진 위키피디아]

WSJ은 “그동안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는 이들은 그 지역을 벗어나지 않고 자기들만의 단단한 커뮤니티를 구축해왔다”며 “그러나 코로나19로 인해 이들이 달라졌다”고 전했다.

그들에게는 나름의 공식이 있었다. 실리콘밸리의 거대 정보기술(IT) 기업, 일명 빅테크 기업에서 고액 연봉을 받고, 핵심 지역인 새너제이의 고급 주택가에 사는 것이다. 실리콘밸리 이외 지역의 기업에 취업하는 것은 낙오처럼 여겨졌다. 경영대학원 입시인 GMAT의 통계에 따르면 MBA를 취득한 뒤 빅테크 기업으로 갓 취직한 신입의 평균 연봉은 최대 20만 달러(약 2억2000만원)이다.

코로나19는 이런 분위기를 바꿔놨다. WSJ은 “(미국 중부) 유타ㆍ미네소타 등에도 실리콘밸리 인재들이 진출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코로나19로 인한 경기 침체 때문만은 아니다.

WSJ에 따르면 많은 실리콘밸리 인재들은 자신들이 나고 자란 도시로 귀향해 의미 있는 일을 한다거나, 자신이 중시하는 가치를 최우선 순위를 두고 일자리를 찾는 추세다. 스타트업뿐 아니라 비영리기구(NGO)의 문을 두드리는 이들도 적지 않다고 WSJ은 보도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삶을 바라보는 방식이 바뀌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실리콘밸리의 흔한 풍경. 애플 최고경영자(CEO) 팀 쿡(왼쪽)과 구글 CEO인 순다르 피차이가 2017년 실리콘밸리 한 베트남 식당에서 대화하고 있는 모습. [중앙포토]

실리콘밸리의 흔한 풍경. 애플 최고경영자(CEO) 팀 쿡(왼쪽)과 구글 CEO인 순다르 피차이가 2017년 실리콘밸리 한 베트남 식당에서 대화하고 있는 모습. [중앙포토]

WSJ이 대표적 인물로 인터뷰한 이는 필립 루트케 전 깃허브(GitHub) 부사장이다. 그는 최근 유타주 소재 포디움(Podium)이라는 스타트업으로 이직했다. 부인도 대 찬성했다. 그는 WSJ에 “(코로나19 이후) 새로운 삶의 환경을 고민하던 중 포디움에서 신기하게도 딱 맞춰 연락이 왔다”며 “바로 유타주로 이주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WSJ은 그가 유타주의 한 설산(雪山)을 오르며 환히 웃는 사진을 게재했다. 고액연봉 대신 자신과 가족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삶의 궤도를 수정한 셈이다.

필립 루트케의 사진. WSJ가 관련 기사를 다루며 톱으로 올린 사진이다. [WSJ 캡처]

필립 루트케의 사진. WSJ가 관련 기사를 다루며 톱으로 올린 사진이다. [WSJ 캡처]

마르셀라 버틀러의 경우는 실리콘밸리 특유의 문화가 싫어 켄터키를 택한 경우다. 실리콘밸리 기업 인사 전문가인 그는 빅테크 기업 두 곳에서 이미 고위직 채용 절차를 밟고 있었지만 켄터키주 렉싱턴으로 최종 목적지를 정했다.

그는 WSJ에 “실리콘밸리는 분명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곳 중 하나인데도 항상 뭔가가 부족하다”며 “사람들은 항상 시간이 부족하고 불평등에 시달리며 뭔가가 항상 모자란다는 강박에 시달린다는 말이 있다”고 말했다. 연봉은 10만 달러 삭감됐고 최신식 전기차도 처분했지만 버틀러는 WSJ에 “홀가분하다”며 “내가 그간 맛보지 못했던 충실한 삶의 풍요로움을 만끽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재들의 실리콘밸리 엑소더스는 중소 규모 스타트업 및 NGO에도 희소식이다. 일류 실리콘밸리 출신을 영입했다고 하면 투자를 받을 수 있는 규모가 커지기 때문이다. 경제 재생을 테마로 하는 NGO인 하트랜드 포워드를 운영하는 로스 드볼은 WSJ에 “은행 대출이나 엔젤 투자자들은 실리콘밸리 출신 인재가 이직했다고 하면 더 많은 금액을 더 빨리 대출해준다”고 말했다.

실리콘밸리 엑소더스가 일시적 유행에 그칠지, 유의미한 흐름으로 이어질지는 아직 판단이 이르다. WSJ은 “코로나19가 실리콘밸리 인재들의 삶의 방식을 바꾸기 시작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고 전했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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