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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배명복 대기자의 퍼스펙티브

당파주의 극복 못하면 미국 앞날에 희망이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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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배명복
배명복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바이든 시대의 미국, 어디로 가나

배명복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배명복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의 승리로 끝난 2020년 미국 대선을 압축하는 두 단어는 분열과 결집이다. 유권자들은 쇳가루가 자석의 N극과 S극으로 쏠리듯이 친(親)트럼프와 반(反)트럼프 진영으로 짝 갈라졌다. 도널드 트럼프 추종자들은 트럼프를 지키기 위해 결집했고, 트럼프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그를 끌어내리기 위해 결집했다. 투표 당일 에디슨 리서치가 전국의 표본 인구 1만559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출구 조사 결과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인구 구조 변하고, 위상 약화하면서 #미국 사회 분열과 갈등 갈수록 심화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 회복 못 하면 #국정 교착과 표류 벗어나기 힘들 것

공화당 지지자의 94%와 민주당 지지자의 94%가 트럼프와 바이든에게 각각 몰표를 던졌다. 트럼프와 힐러리 클린턴이 맞붙은 2016년 대선 때는 88%와 89%였다. 그때보다 쏠림 현상이 훨씬 심해졌다. 양쪽이 각기 똘똘 뭉쳐 투표에 적극 참여한 결과, 투표율(66.4%)은 1900년 이후 120년 만에 최고를 기록했다. 바이든은 미 대선 사상 가장 많은 7904만 표를 획득했고, 트럼프는 4년 전보다 거의 1000만 표가 많은 7334만 표를 얻고도 패배했다. 승패를 결정지은 건 전체 유권자의 26%에 달하는 무당파(無黨派)였다. 4년 전 46:42로 트럼프 쪽으로 살짝 기울었던 무당파의 표심이 이번에는 41:54로 바이든 쪽으로 쏠렸다.

쏠림 현상, 4년 전보다 훨씬 심해져

다인종 연방 국가인 데다 지역별 환경과 여건이 판이한 미국의 속성상 여론의 분열은 피하기 힘들다. 노예제 존폐를 둘러싼 분열로 19세기에는 참혹한 내전까지 겪었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공화당과 민주당이 번갈아 집권하는 정권 교체의 전통이 자리 잡으면서 어느 정도 분열을 극복할 수 있었다. 진보와 보수가 정치적 균형을 이루면서 그때그때 상처를 치유하고, 갈등을 해소했다. 특히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백인 중산층이 미국 사회의 굳건한 토대를 이루면서 포용과 관용의 정신으로 약자를 보호하고,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었다. 그걸 바탕으로 미국은 정치·경제적으로 세계를 리드할 수 있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인구 구조와 국제적 위상에 중대한 변화가 생기면서 미국은 다시 심각한 분열의 늪에 빠져들었다.

미국의 백인 인구 비율은 지난해 60.1%까지 떨어졌다. 16세 이하 연령층에서 이미 백인은 절반에 못 미치는 소수 인종으로 전락했다. 앞으로 25년 후인 2045년이 되면 백인은 다수 인종의 지위를 잃게 될 전망이다. 2008년 아프리카계 흑인 출신인 버락 오바마의 집권은 백인들의 잠재적 불안감에 불을 붙이는 도화선이 됐다. 이민 국가인 미국에서 반(反)이민과 국경 장벽 설치를 공약한 백인 우월주의자 트럼프가 오바마의 후임자가 된 것을 우연으로 볼 수 있을까.

이번 선거에서도 남녀를 떠나 백인들의 표심은 트럼프 쪽으로 쏠렸다. 백인 남성은 61:38, 백인 여성은 55:44의 비율로 트럼프의 손을 들어줬다. 흑인은 12:87, 중남미 출신 라티노는 32:65, 아시아계는 34:61로 트럼프보다 바이든을 찍었다. 인종주의에 반대하고, 소수자의 권리를 중시하는 대도시 거주 고학력 백인들의 목소리를 미국 전체 백인들의 목소리로 착각한 탓에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이 2016년 대선 때 헛다리를 짚었다. 쇠락한 중부 공업 지대인 러스트 벨트에 사는 백인 서민층인 ‘힐빌리(hillbilly)’와 남부의 빈곤한 백인 농민과 노동자 계층인 ‘레드넥(redneck)’이 느끼는 좌절감과 소외감에 주목하지 못한 채 백인 엘리트 계층을 대변하는 미 주류 언론의 목소리를 미국 전체의 여론으로 오독(誤讀)했다.

백인들은 남녀 불문 트럼프 더 지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자신의 승리가 사실상 확정된 지난 7일 델라웨어주 윌밍턴에서 한 연설에서 미국인들에게 분열의 상처를 치유하고 통합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자신의 승리가 사실상 확정된 지난 7일 델라웨어주 윌밍턴에서 한 연설에서 미국인들에게 분열의 상처를 치유하고 통합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연합뉴스]

20세기는 미국의 세기였다. 1,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소련의 붕괴로 냉전이 끝나면서 미국은 유일 초강대국으로 부상했다. 하지만 9·11테러 이후 무모한 군사 개입으로 막대한 자원을 낭비했다. ‘테러와의 전쟁’에 국력을 소진하면서 초강대국 지위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엎친 데 겹친 격으로 중국이 무서운 속도로 치고 올라왔다. 미국이 주도한 세계화의 물결은 중국에 축복이 된 반면 미국의 노동자들에겐 저주가 됐다. 특히 일자리를 중국에 빼앗긴 저학력·미숙련 백인 노동자들에게는 재앙이었다. 백인 저소득층이 느끼는 불안과 분노를 트럼프가 정치적으로 이용하면서 분열은 심화하고, 갈등은 증폭됐다. 주류 언론을 압도할 정도로 커진 소셜미디어의 위력은 여론의 양극화를 부채질하는 촉매제로 작용했다. 트위터는 트럼프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됐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MAGA)’가 트럼프의 슬로건이었다면 ‘미국을 다시 존중받게(Make America Respected Again·MARA)’는 바이든의 슬로건이다. 트럼프가 훼손한 민주주의를 복원하고, 다자주의 원칙에 따라 국제사회에 복귀해 미국이 주도해온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회복함으로써 미국의 위상과 권위를 되찾겠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가치를 공유하는 동맹국 및 우방국들이 참여하는 ‘글로벌 민주주의 정상회의’ 창설을 통해 중국의 부상을 견제한다는 구상도 밝히고 있다.

상원 장악 못 하면 국정 주도 못 해

바이든의 복안이 현실이 되려면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부터 회복해야 한다. 트럼프 개인이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그의 불복 행위를 많은 미국인이 옹호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얘기다. 그런 미국이 민주주의의 수호자 겸 전도사를 자처하는 걸 세계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대화와 타협, 양보와 존중은 민주주의의 조건이다. 이번 선거에서 극명하게 나타난 분열과 당파주의를 극복하지 못하면 미국의 앞날에는 희망이 없다.

바이든도 이를 잘 알기 때문에 승리 연설에서 치유와 통합을 강조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상원을 장악하지 못하면 뜻대로 국정을 끌어갈 수 없다. 정원 100석인 상원은 이번 선거에서 49:49로 양분됐다. 남은 두 석은 내년 1월 5일 실시될 조지아 주 결선투표에서 결정된다. 민주당이 두 석을 다 가져오지 못하면 상원은 여전히 공화당 수중에 남는다.

바이든이 구상한 개혁 법안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각료와 고위직 임명부터 심각한 차질을 빚을 것이다. 대통령 행정명령으로 입법 조치를 우회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6:3으로 완전히 보수 쪽으로 기운 대법원에 번번이 발목이 잡힐 수 있다. 분열과 대립 때문에 옴짝달싹 못 한 오바마 시대의 ‘교착(gridlock)’ 국면이 재연될 수 있다. 바이든은 평생을 정치에 몸담은 노정객의 경륜으로 워싱턴을 당파주의의 수렁에서 건져낼 수 있을까. 힘든 도전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미국은 중국을 거칠게 대할 필요 있다”

바이든 행정부에서도 미·중 관계는 대외정책의 톱 아젠다가 될 전망이다. 바이든은 지난 봄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스’에 기고한 ‘왜 미국이 다시 이끌어야 하나’란 글을 통해 대중(對中) 정책 구상을 밝힌 바 있다. 그중 일부를 인용한다.

“미국은 중국을 거칠게 대할 필요가 있다. 이대로 두면 중국은 계속 미국과 미국 기업들의 기술과 지적 재산을 훔치고, 보조금 지급이라는 부당한 특혜를 국유 기업들에 제공함으로써 미래 기술과 산업의 주도권 다툼에서 우위를 점하려 할 것이다.”

“문제는 누가 통상 관련 규칙을 정하느냐는 것이다. 노동자를 보호하고, 환경과 투명성, 중산층 임금을 보장하는 룰을 누가 확실하게 만들 수 있느냐는 것이다. 중국이 아닌 미국이 그런 노력을 주도해야 한다.”

“중국의 도전에 대응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기후변화나 비확산, 글로벌 보건 안전 등 이해가 일치하는 이슈에서는 서로 협력하면서도 중국의 폭력적 행위나 인권 침해에 대해서는 동맹 및 우방국들과 연합전선을 구축해 단호히 맞서는 것이다.”

“미국은 혼자서 전 세계 국내총생산(GDP)의 4분의 1을 담당하고 있다. 민주주의 우방국들을 합하면 50%가 넘는다. 글로벌 경제의 절반이 넘는 부분을 중국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들이 연합하면) 노동 환경부터 통상, 기술, 투명성까지 모든 면에서 민주적 이해와 가치가 반영된 룰을 정하는 실질적 레버리지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배명복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