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보·예방 사각지대 '실버 에이즈' 는다

중앙일보

입력

올해 78세인 A씨는 2년 전 후천성면역결핍증(에이즈) 감염 사실을 알게 된 뒤 암울한 노년을 보내고 있다.

4년전쯤 할아버지.할머니들이 모여 성관계를 맺는 속칭 '묻지마 모임'에 나간 것이 화근이었다.

10년 전 부인과 사별한 그는 "그 모임 이후에도 가끔씩 성관계를 했으니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에게 병을 옮겼을 수도 있다"며 괴로워한다.

66세인 B씨. 그는 몇년 전 동남아 관광에서 현지 매춘녀와 관계를 가진 뒤 지난해 에이즈 감염판정을 받고 자포자기 상태의 삶을 살고 있다.

그는 "에이즈에 대해 잘 알지도 못했고, 설마 내가 걸리리라는 걱정은 전혀 해보지 않았다"고 했다. 에이즈에 대한 홍보가 미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국내에서 하루 한명꼴로 에이즈 환자가 발생(국립보건원 집계)하는 가운데 노인들의 감염도 빠르게 늘고 있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성(性)문제에서 예외적인 존재로 인식돼 에이즈 예방과 홍보에 소외된 채 사실상 무방비로 노출돼 있기 때문이다.

◇감염자 증가 속도 두배

지난달 말 현재 국내 에이즈 감염자는 1천7백87명.

그 중 60세 이상은 68명(여성 6명)으로 3.8% 정도다.

하지만 증가 속도는 예사롭지 않다. 1987년 1명이 첫 확인된 이래 98년 5명, 99년과 2000년엔 10명씩 늘더니 지난해에는 무려 22명이 늘었다. 증가율로 따져 전체 감염자 증가율(52%)의 두배를 기록한 것이다.

올 들어 확인된 감염 노인도 7명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노인들이 에이즈 자체에 무지하거나 검사를 꺼리는 경우가 많아 실제 감염자 수는 훨씬 많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에이즈에 대한 홍보가 젊은층에 집중되고 있는 한 이같은 상황은 갈수록 심각해질 것이라는 지적이다.

◇음성적 성생활이 문제

국립보건원에 따르면 지난 3월 현재 노인 에이즈 감염자 60명 중 56%인 38명이 성관계를 통해 감염됐다.

특히 그중 11명은 동남아 등 해외여행 때 현지 매춘녀들과 어울린 것이 원인이 된 것으로 확인됐다.

국내에선 서울 종묘공원이나 관악산 등 노인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의 매춘여성들이나 술집 접대부.시골 티켓다방 종업원, 노인들끼리의 '묻지마 관광' 등이 주요 성 접촉 경로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여성 감염자 6명 중 4명은 남편으로부터 감염된 것으로 판명됐다. 부부가 함께 에이즈로 고통받고 있는 것이다.

대한에이즈예방협회 이창우 사무국장은 "체면과 자격지심, 에이즈에 대한 지식 부족 때문에 매춘 여성 등과 비위생적으로 은밀히 욕구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지적했다.

한국에이즈퇴치연맹의 박승미 상담실장은 "노인들은 구체적 내용을 말하길 꺼리는 데다 검사받는 것도 기피해 발병해서야 에이즈 감염사실을 확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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