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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민간인 살해한 북한의 만행을 규탄한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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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북한이 지난 21일 연평도 인근 해상에서 장시간 표류해 기진맥진해 있던 대한민국 해수부 공무원 A씨에게 총격을 가해 살해하고 시신에 기름을 부은 뒤 불을 질러 훼손했다. 천인공노할 만행이다. 북한은 최근 코로나 방역을 구실로 “국경지대 1㎞ 이내에 접근하는 외부인은 사살한다”는, 문명국가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반인륜적 수칙을 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어떤 명분으로도 비무장 민간인을 사살해 시신을 불태운 행위는 용납될 수 없다. 전시에도 민간인 사살을 금지한 제네바 협약을 정면으로 위반한 국제적 중범죄다. 또 A씨가 사살된 장소는 9·19 남북군사합의서에서 일체의 적대행위를 금한 완충해역이다. 북한은 남북군사합의도 정면으로 어긴 것이다.

제네바 협약, 9·19 남북군사합의 위반한 범죄 #지켜만 본 군…종전선언 나간 경위도 밝혀야

우리 군은 차가운 가을바다에서 40여 시간 표류하던 A씨를 북한 수상사업소 선박이 발견해 월북 경위를 추궁한 뒤 해상에 장시간 방치한 과정을 실시간으로 파악했다. 그때 북측에 A씨의 송환을 요구하며 신속히 대응에 나섰다면 A씨가 여섯 시간 만에 사살당하고 불태워지는 최악의 상황은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군은 “우리 영해가 아니다”며 손을 놓고 지켜만 봤다. 군의 존재 이유인 국민의 생명 보호를 저버린 것이다. 그래놓고 “북한이 그렇게까지 나가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는 변명에다 “9·19 합의에 총 쏘지 말라는 규정은 없다”는 북한 감싸기로 넘어가려 하니 참담하다.

A씨는 자녀 둘을 둔 평범한 가장이다. 그런데 군은 A씨가 월북을 시도하다 살해됐다고 발표해 의혹을 증폭시키고 있다. A씨의 업무(어업 지도)는 배에서 실족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아 단순 표류하다 북한 수역에 들어갔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설령 A씨가 월북을 시도한 게 사실이라면 북측이 왜 사살했는지도 의문이다. 지난 7월 한국에서 성범죄를 저지르고 월북한 탈북자 김모씨는 북한에 별 탈 없이 들어간 건 물론이고 사면까지 받았다고 한다. 정부가 남북관계 악화를 우려해 명확한 증거도 없이 A씨에게 ‘월북’이란 주홍글씨를 단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이유다.

공개 시점도 문제가 심각하다. 군은 21~22일 벌어진 A씨 실종·사망 사건을 함구하다 언론이 국회발로 보도를 개시하자 24일 오전에야 공개해 은폐·축소 의혹을 자초했다. 청와대의 대응도 의혹투성이다. 청와대는 A씨가 살해된 직후인 21일 밤 10시30분쯤 관련 첩보를 입수하고 세 시간 만에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소집했다. 그만큼 사안을 심각하게 봤다는 증거다. 그런데도 문 대통령은 그 직후 화상으로 진행된 제75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남북 종전선언을 제안했다.

청와대는 “연설이 지난 15일 녹화된 내용이고, 첩보의 신빙성이 확인되지 않아 연설을 그대로 내보냈다”고 한다. 비상 상황이었음에도 북한에 유화적인 내용이 담긴 연설을 수정 없이 내보낸 건 ‘종전’ 이벤트에 집착해 국민의 생명은 뒷전으로 미뤄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청와대는 이번 사건이 문 대통령에게 언제 어떻게 보고됐는지, 또 종전선언 연설이 그대로 나간 이유는 무엇인지 투명하게 밝혀야 한다. 여당도 야당의 상임위 개최 요구에 응해 국회 차원에서 투명하게 진상조사를 하고, 책임자 문책과 재발 방지 대책 수립에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북한이 책임지고 사죄해야함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