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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영, 권순일 문제 왜 외면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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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
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영향력 있는 정치 리더다. 그의 국회 연설이 얼마나 강력했던지 윤영찬 여당 의원이 언론에 외압을 가해 관련 기사를 끌어내리려 했을 정도다. 주 대표는 정권의 어리석음을 설득력있게 꾸짖을 줄 안다. 사고가 합리적이고 행동이 사리에 맞으며 신사적인 태도를 갖췄다.

선관위 인사권까지 챙긴다는데 #내년 서울시장 선거도 편파 우려 #선관위원장 ‘즉각 사퇴’ 요구해야

그런 주호영에게서 요즘 이상한 점이 눈에 띈다. 4·15 국회의원 선거 하루 전 코로나 지원금을 빨리 받게 해주겠다고 대국민 선심성 발언을 한 문재인 대통령에게 경고 한마디 날리지 못한 권순일 중앙선관위원장 문제를 외면하는 것이다. 권 위원장은 9월 8일 대법관을 그만뒀는데도 선관위원장 자리에 계속 앉아 있다. 급기야 21일 있을 중앙선관위 사무총장, 사무차장 인사까지 챙기겠다고 억지를 쓰는 중이다. 주지하다시피 권순일이 지휘했던 총선은 1987년 민주화 이래 최악의 편파 및 불공정 시비로 얼룩졌다.

사후관리마저 부실해 120여 건 선거소송의 법정 데드라인이 10월 15일로 코 앞에 닥쳤는데 여태 재판 한 번 열리지 않고 있다. 증거보전 신청이 받아들여진 30여 곳 선거구에서 단 한 건의 재검표도 이뤄지지 않았다. 모른 척, 늑장 부리기가 일쑤인 선거재판 부실 문제는 친여권 성향인 김명수 대법원장의 무능·무력함과 직결돼 있다. 그렇다 해도 중앙선관위원장으로서 최근까지 최고참 대법관이었던 권순일의 책임이 김명수에 비해 작다고 볼 수 없다.

이렇게 문제 많은 사람이 2021년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와 2022년 대통령 선거를 관리할 선관위 핵심 보직을 인사하겠다고 한다. 권 위원장의 욕심이야 이미 지적한 바 있지만(8월 17일자 본 칼럼) 그의 정치적 운명줄을 쥐고 있는 주 원내대표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는 것은 유감이다. 중앙선관위원장은 중립성과 공정성이라는 ‘명예로운 권위’로 심판을 보는 자리다. 경쟁의 한쪽 당사자인 제1 야당 대표가 정치적으로 비토하면 하루도 존립하기 어려운 게 선관위원장이라는 지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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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야당인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는 “얻을 만큼 얻었고 오를 데까지 오른 인생 아닌가. 더 이상 추한 모습을 보인다면 국민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며 권순일 위원장의 즉각 사퇴를 요구했다. 반면에 주호영은 입을 다물고 있다. 주 대표의 침묵은 권순일의 기이한 행보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권 위원장의 몸에 날개를 달아준 효과를 냈다. 권 위원장은 대법관이 아님에도 선관위원장직을 수행하는, 법 정신에도 안 맞고 전례도 없는 괴상한 행동의 주인공이 됐다.

권순일의 과거 행적을 살피건데 21일 선관위 회의에서 그가 여당한테 유리한 편파 인사를 단행하리라는 예상은 합리적이다. 이 경우 중앙선관위의 시장 보선과 그 뒤 대선 관리에 흔쾌하게 승복할 유권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주호영 대표가 나서 권 위원장이 돌이킬 수 없는 인사 실패를 감행하기 전에 즉각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공식 요구할 필요가 있다. 권순일이 막가파 인사로 윤석열 검찰총장의 날개를 꺾은 추미애 법무장관처럼 행동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판사 출신인 주호영이 행여 사법연수원 14회 동기인 권순일과 사적 인연을 의식해 그의 거취 문제를 외면한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베네수엘라는 차베스 정권이 대법원 판사의 정원을 늘려 친여 인사로 채우고, 중앙선관위원 5명한테 퇴임 후 좋은 공직을 약속함으로써 군중 독재 즉, 민주주의 파괴를 완성했다. 선관위의 타락이 민주주의 붕괴의 마지막 단추였다. 한국도 문재인 정권에서 그런 조짐이 뚜렷하다. 권순일은 자신이 소속했던 대법원과 중앙선관위에서 공히 민주주의를 망친 인물로 기록될지 모른다. 개인의 슬픔이자 나라의 비극이다. 주 대표가 상황의 엄중함을 깨달아야 한다. 애매한 침묵을 깨야 한다. 권순일을 바로 물러나게 해야 한다. 선관위를 살려야 한다.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