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제1차 한국판 뉴딜 전략회의.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대표 취임 후 처음으로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는 자리였다. 문 대통령은 행사 시작에 앞서 이 대표와 인사하면서 즉석에서 “점심 식사를 같이 할 수 있느냐”고 했다고 한다. 대통령이 사전에 일정을 정하지 않고 당일에 오찬 약속을 잡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민주당 지도부 관계자는 7일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이 대표는 기존에 오찬 약속이 있었는데 취소하고 문 대통령 요청에 맞췄다”고 했다.
이 대표와 비공개 오찬 공개 지시 #이 지사 ‘수재민 조립주택’도 두둔 #전문가 “현직 대통령 입장에선 #대선주자 카드 여럿 있어야 유리”
문 대통령과 이 대표는 행사가 끝난 뒤 청와대 상춘재에서 오찬을 했다. 이 자리에는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만 배석했다. 3명만 마주 앉았다는 것은 문 대통령이 그만큼 내밀한 얘기를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당초 이 오찬은 비공개 일정이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오찬이 끝난 뒤 노 실장에게 “오찬 사실과, 이 자리에서 오간 일부 대화를 대변인을 통해서 알려도 된다”는 취지로 지시했다고 한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노 실장이 오찬에서 나와 대변인 등을 불러 서면브리핑을 준비하라고 했다”고 말했다. 강민석 청와대 대변인은 문 대통령이 오찬에서 이 대표에게 “든든하다. 언제든지 대통령에게 상의하시라. 주말도 상관 없으니 전화하시라”고 말했다는 내용의 서면 브리핑을 곧 발표했다.
이에 따라 이날 즉석 오찬 제안→오찬 일정 공개→항상 소통하겠다는 메시지 등 일련의 과정이 문 대통령이 차기 유력한 여권 대선주자인 이 대표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거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앞서 문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전당대회 직후 이 대표에 전화를 걸어 당선을 축하하며 “언제든지 편하게 전화해달라. 이 대표 전화는 최우선으로 받겠다”고 했다.
이 대표와 가까운 재선 의원은 “이 대표가 초대 국무총리이기도 했고, 당시 문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전용기를 빌려준 사례 등을 돌이켜보면 문 대통령이 이 대표를 각별히 챙기는 건 사실”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총리이던 이 대표는 나루히토(德仁) 일왕 즉위식 참석을 위해 일본을 방문했는데, 당시 문 대통령은 대통령 전용기인 공군 1호기를 내줬다.
이처럼 문 대통령과 이 대표의 접점이 늘어나면서, 또다른 유력 여권 대선주자인 이재명 경기지사의 독자 행보가 상대적으로 도드라진다는 평가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4일 집중호우로 인한 긴급상황점검회의에서 “경기지사가 건의한 대로 임시 주거시설로 조립주택을 활용하는 방안에 중앙부처도 관심을 가져 달라”고 언급하는 등 이 지사의 정책을 지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이 지사가 2차 재난지원금 지원을 두고 문 대통령, 이 대표와 뚜렷한 입장차를 보이면서 점차 간극이 벌어지고 있는 형국이다. 일각에선 '2 대 1'의 구도가 형성되는 거 아니냐는 얘기도 나온다.
이 지사는 지난 5월 1차 재난지원금 지급 때부터 ‘전 국민 지급’을 주장했고, 2차 재난지원금도 같은 주장을 했다. 반면 이 대표는 “선별 지급이 신념”이라고 밝히면서 이 지사와 다른 입장을 보였다. 결국 6일 당·정·청이 선별 지급으로 결론을 내리자 이 지사는 페이스북에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 나아가 국가와 공동체에 대한 원망과 배신감이 불길처럼 퍼져가는 것이 제 눈에 뚜렷이 보인다”고 강하게 성토했다. 특히 '문재인 정부'라고 적시함에 따라 이 지사는 '친문' 지지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이와 관련 문 대통령은 7일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재난지원금 금액과 지원 대상, 지급 방식에 대해 다른 의견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적은 금액이라도 국민 모두에게 재난지원금을 지급하자는 의견도 일리가 있다”면서도 “하지만 현실적으로 재정상 어려움이 크다. 피해 맞춤형 재난지원은 여러 가지 상황과 형편을 감안하여 한정된 재원으로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했다.
문 대통령이 이 지사 주장을 그대로 맞받아치기보다는 일부 인정하는 모양새를 취하면서도 결국엔 이 대표 주장에 더 힘을 실어준 것이다. 이 지사는 문 대통령 발언 직후 라디오에 출연해 “이미 정해진 정책이 무리 없이 집행되도록 적극 지원해야 할 것”이라며 한 발 물러난 입장을 보였다. 이 지사 측근인 한 의원은 “이 지사의 선별 지급 주장은 문 대통령에 각을 세운다기보다는 그의 기본 경제 철학이다. 선별 지급되고 한달만 지나면 이 지사의 주장이 얼마나 타당했는지 증명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향후 정치 지형 변화에 따라 문 대통령과 이 대표, 이 지사 사이의 거리는 달라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대통령으로서는 차기 대선 주자로 여러 카드를 갖고 있는 게 유리하다"며 "문 대통령은 당연히 범친문이자 현 정부 인사였던 이 대표와 심리적 거리는 가깝겠지만, 상황이 변하면 이 지사에게도 신뢰를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지사 측근은 문 대통령과 이 대표의 접점이 많아지는 데 대해 “대통령 입장에서 현재로선 여당 대표를 더 각별히 챙기고 소통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윤성민 기자 yoon.sungm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