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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현상의 시시각각

‘미래’에 갇혀버린 서울 그린벨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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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이현상 논설위원

이현상 논설위원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덫에 걸렸다. 풀려고 할수록 더 옥죄어 온다. 무리수가 무리수를 부르고, 땜질 위에 땜질하는 식이다. ‘시장의 문제’인 부동산을 ‘정의의 문제’로 여기고 덤벼든 과욕이 화근이다.

‘닥치고 사수’에 청년 고통 외면 #8·4 대책에도 집값 불안은 여전 #훼손 녹지에 ‘100% 임대’ 어떤가

수요 억제에 매달리다 뒤늦게 방향을 틀어 공급 확대책을 내놓았지만 반응은 영 신통찮다. 고밀도 재건축을 허용하되 발생 이익의 90%를 공공임대주택 등으로 회수하겠다는 방안에 서울 강남의 주택조합들이 미지근하다. 이럴 바엔 차라리 1:1 재건축으로 ‘명품 단지’를 만들겠다는 곳까지 나온다. 13만 가구 공급 계획 중 고밀도 재건축으로 5만 가구를 담당하겠다는 계획이 시작부터 뒤틀어졌다. 태릉골프장, 정부과천청사, 상암동 DMC랜드마크 등 유휴부지에 아파트를 짓겠다는 계획도 지역 주민들의 반발에 부닥쳤다.

결국 다시 그린벨트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이 ‘발굴해서라도 공급을 늘려라’고 지시했지만, 사실 서울에는 이렇다 할 땅이 없다. 이 때문에 그린벨트 해제 방안이 떠올랐지만 한바탕 논란 끝에 결국 없던 일이 됐다. 그러고서 나온 8·4 공급 대책은 효과가 의심스럽다. 모처럼 내놓은 공급 방안이 마땅찮다는 인식이 퍼지면 시장의 ‘패닉 바잉’ 현상은 진정시키기 힘들다.

그린벨트 사수에는 환경 보호라는 당위론이 작동한다. 그린벨트는 미래 세대를 위한 보물이란다.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궁금해진다. 서울 바깥에 짓는 3기 신도시 입지의 90%는 그린벨트다. 환경보전 가치가 높은 1~2급지도 절반가량 된다. 이런 그린벨트는 보물이 아니고 뭐였나. 강남 그린벨트는 한 뼘도 손대지 못한다면서 환경보존 가치 2급 그린벨트인 태릉골프장은 파헤쳐도 된다는 말인가. 이러니 그린벨트가 미래 세대의 보물이 아니라 ‘강남 집값 지키는 보물’이라는 의심이 든다.

그린벨트는 50년 전, 서울 인구 500만 명대 시절 그어졌다. 반세기 전, 그것도 강압적으로 만들어진 틀을 ‘닥치고 사수’하자는 생각이 타당한지 따져봐야 한다. 마구 파헤치자는 주장이 아니다. ‘그린’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서울 그린벨트의 20% 이상은 환경상 큰 가치가 없는 3~5등급이다. 비닐하우스로 점령하고 있는 ‘실버 벨트’도 수두룩하다.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득과 실을 견줘봐야 한다. 그린벨트에는 순기능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도심의 땅값을 올리고, 그린벨트 바깥의 난개발을 부르기 쉽다. 도심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길어지면서 사회적 비용도 커진다. 그 비용을 무주택 서민과 청년층, 서울에서 밀려난 ‘부동산 난민’들이 부담하고 있다.

그린벨트를 풀어 집을 짓자는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진보 진영을 중심으로 “그린벨트 해제는 안 된다. 주거 안정을 위해서라면 공공임대주택을 늘려라”는 주장이 나왔다. 말은 그럴듯한데 현실이 만만찮다. 입으로는 주거 안정을 외치던 여당 정치인까지 자기 지역에 공공임대가 들어선다는 소식에 화들짝 놀라는 판이다. 현실성 없는 이상에 갇혀 공회전하기보다는 훼손된 그린벨트에 100% 공공임대주택을 짓는 대안을 고려해야 한다. 정부도 출범 초 발표한 ‘주거복지 로드맵’에서 그린벨트를 해제해 공적 임대주택을 늘리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나.

공공임대 기피 현상을 ‘정의’의 틀로 해결하기엔 시장의 욕망이 너무나 복잡하다. 답이 마땅찮다면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공공임대가 청년·서민을 ‘월세 소작농’으로 만든다는 지적도 있지만, 충분하면서도 질 좋은 공공임대가 ‘패닉 바잉’ 완충 역할은 할 것이다.

부동산 문제에 청년의 미래가 위협받고 있다.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소리가 엄살로만 들리지 않는다. 이런 마당에 미래에 남겨줄 보물 운운하며 별 가치도 없는 훼손된 녹지까지 끌어안고 있는 것이 맞는가. 어차피 그 미래, 청년들이 짊어지고 있다. 미래에 갇혀 버린 그린벨트를 조금 풀어 우리 청년들에게 미래를 선물할 생각은 없는가.

이현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