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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해고자도 노조 가입' 재추진…"기업 떠나라는 얘기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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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자와 해고자도 기업 노조에 가입할 수 있도록 정부가 법 개정을 추진한다. 퇴직 교원의 교원노조 가입도 가능하도록 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경제난 속에 정부가 노조에 힘을 실어주는 법 개정안을 다시 들고나오자 경영계가 강력 반발하고 나섰다.

[뉴스분석]국무회의 의결 노조법

정부는 23일 문재인 대통령이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공무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공무원노조법), 교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교원노조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지난 8일 오후 서울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열린 ILO 핵심협약 비준 관련 3개 법안 입법 예고에 대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 법외노조 해고자 입장 발표 및 해고자 투쟁 알림 기자회견에서 한 참석자가 '법외노조 취소'가 프린트 된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다. 뉴스1

지난 8일 오후 서울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열린 ILO 핵심협약 비준 관련 3개 법안 입법 예고에 대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 법외노조 해고자 입장 발표 및 해고자 투쟁 알림 기자회견에서 한 참석자가 '법외노조 취소'가 프린트 된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다. 뉴스1

20대 폐기 법안, 176석 여당 재추진 

3개 개정안 모두 지난 20대 국회 때 논의를 제대로 시작도 못 하고 폐기된 법안이다. 야당과 경영계의 거센 반대에 부딪혀서다. 하지만 21대 국회 상황은 다르다. 176석을 차지한 ‘거여’ 구도라 정부ㆍ여당이 마음만 먹는다면 통과가 가능하다.

노조법 개정안엔 실업자와 해고자도 기업별 노조에 가입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담겼다. 대법원 판례에 따라 지금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노총) 등 초기업 노조에 실업ㆍ해고자도 가입ㆍ활동이 가능하다. 이번에 개정하는 법안은 예외로 뒀던 기업 단위 노조 문호까지 실업ㆍ해고자에게 여는 내용이다. ‘근로시간 면제 한도 내’란 단서를 달긴 했지만 노조 전임자에게 급여를 지급하지 못 하게 한 규정도 없앤다.

문재인 대통령이 23일 오전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제32회 국무회의 및 수도권 방역 대책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23일 오전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제32회 국무회의 및 수도권 방역 대책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대신 경영계 요구를 개정법안에 일부 반영했다. 해고ㆍ퇴직자의 기업 출입, 시설 사용에 대해서도 노사가 합의한 절차를 따르도록 했다. 노조 단체협약 유효기간 상한이 2년에서 3년으로 1년 늘어난다. 사업장 내 생산시설이나 주요 업무시설을 점거하는 형태의 쟁의 행위는 금지된다. 노동계가 ‘개악’이라고 비판하는 부분이다.

전교조 합법화, 소방공무원 노조도 가능 

정부는 퇴직 교원의 노조 가입을 허용하는 내용으로 교원노조법도 개정한다.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전교조는 합법 노조 자격을 회복한다. 해직 교사를 조합원으로 뒀다는 이유로 2013년 전교조는 정부로부터 법외 노조 통보를 받았다.

또 가입 대상을 6급 이하로 제한하는 직급 기준을 삭제하는 공무원노조법 개정안도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고위직 공무원도 노조에 가입할 수 있게 된다. 소방 공무원과 퇴직 공무원의 노조 가입도 허용된다. 다만 지휘ㆍ감독자, 업무 총괄자 등 책임자급의 노조 가입은 여전히 제한된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20대 국회에서 일괄 폐기됐던 법안인데, 이번에 다시 발의해 21대 국회에서 충분히 논의할 수 있는 길을 다시 연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고용부는 국제노동기구(ILO) 핵심 협약 비준을 위해서는 노조 관련 3개 법안을 고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업자ㆍ퇴직자 노조 가입도 ILO 회원국이 다 허용하고 있는 조치라는 걸 내세우고 있다. 정부가 노조법 개정을 서둘러 재추진하는 속내는 또 있다. 유럽연합(EU)은 자유무역협정(FTA)에 규정한 ILO 핵심 협약 비준 노력을 정부가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며 분쟁 해결 절차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한ㆍEU는 FTA 위반 여부를 가릴 전문가 패널을 구성했다. 코로나19로 절차가 중단 상태이긴 하다. 유엔(UN) 경제ㆍ사회ㆍ문화 권리 국제규약위원회도 ILO 핵심 협약 비준에 한국 정부가 소극적이라며 올 초 공개 압박에 나서기도 했다.

"코로나 위기에 경영 부담 커져" 

이에 대해 한국경영자총협회 등 사용자 단체는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지난 9일 경총과 한국무역협회, 중소기업중앙회, 한국중견기업연합회는 이례적으로 공동 성명까지 냈다. 4개 단체는 “코로나19에 따른 경제위기로 인해 기업은 외환위기나 금융위기 때보다 훨씬 더 심각한 최악의 경영 환경에 내몰려 있다”며 “이런 시점에서 ILO 핵심협약 비준을 명분으로 기업이 가장 민감하고 곤혹스럽게 느끼고 있고, 노사 관계를 더욱 어렵게 만들 수 있는 내용의 노조법 개정을 정부가 추진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밝혔다. 정부 입법안이 일방적으로 노조의 힘을 강화하는 방향이어서, 가뜩이나 대립적인 노사간 갈등을 고조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는 주장이다.

코로나19 경제위기 상황에서 노조법 개정을 추진하는 데 따른 우려의 목소리도 이어지고 있다. 김동원 전 고려대 경제학과 초빙교수은 “정부가 최근 기업 유턴을 지원하겠다고 했는데 기업이 한국을 떠나는 가장 큰 문제는 노사 문제와 법인세다”라며 “이런 상황에서 오히려 노조에 기울어져 있는 법안을 재추진한다는 건 기업 보고 떠나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정부 정책 방향이 갈팡질팡인데 기업이 어떻게 정부를 신뢰할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신세돈 숙명여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문재인 정부가 노조의 지지를 얻고 있고, 또 수적으로 (유권자 중) 노조나 노조 가입자 비중이 크기 때문인지 노조 권한은 강화하는 반면 경영의 애로 사항에 귀를 기울여 줄 의지가 없어 보인다”고 지적했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현실과 맞지 않은 낡은 규범을 바꾼다는 관점에서 법안 개정이 추진돼야 하는데, 정당하게 해고된 근로자도 기업 조합원으로 참여하는 것에 대해 국민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까 의문”이라고 말했다.

세종=조현숙ㆍ하남현 기자, 최선욱 기자 newea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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