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성(性) 본능은 고장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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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이야기하자구요. 섹스를 주제로 한 이야기에 관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남자들끼리 할 이야기가 없으면 군대 이야기와 섹스 이야기가 빠지지 않잖아요. 그런 면에서는 또 ´애나 어른이나 똑같다´고도 하는 것 아니냔 말입니다. 점잖은 체 하던 분들도 일단 자리의 분위기만 그런 방향으로 만들어지면, 흥미로워 하는 걸 곧 바로 느낄 수 있는 거잖아요. 여자라고 뭐 별 다를 게 있겠어요? 소설 ´토지´에 나오는 시골 아낙네들의 우물가에서의 수다 안에 남녀 상열이 빠지지 않잖아요.

섹스를 주제로 한 책들도 참 많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정말 섹스, 포르노 등 말초신경을 자극해 상업적인 수익만을 거두겠다는 속셈이 빤한 책들도 있지만, 섹스의 의미를 철학적, 사회학적, 인류학적으로 고찰한 무게 있는 책들도 적지 않아요. 그런데 조금 흥미로운 책인 듯 싶으면 알맹이 없이 말초신경만 자극하고, 조금 진지한 듯 하면, 지나치게 무게를 잡아 몇 쪽 넘기기 어려워지는 게 보통입니다.

새로 나온 책 ´성은 환상이다´(기시다 슈 지음, 박규태 옮김, 이학사 펴냄) 역시 섹스를 주제로 흥미와 깊이를 갖추려 애쓴 책입니다. 게다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섹스에 대한 이야기가 그 동안의 진부한 성담론과는 사뭇 별다른 점이 많아 더 눈길이 갑니다.

사람의 섹스 본능은 고장났다는 거지요. 즉 본능에 따라 남자가 여자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본능에 따르는 섹스가 불가능해진 인간은 모두가 ´성적 불능 상태´라는 이야기입니다. 그 ´성적 불능´은 마침내 인류의 종족 보존조차 불가능하게 할 것이므로, 사람들은 섹스를 위해 환상을 만들어냈고, 그 환상의 힘을 빌려 섹스를 하고, 자손을 퍼뜨리게 됐다는 것이지요.

한걸음 더 나아가 지은이는 인간은 모두 성 도착자라는 도발적인 선언을 내세웁니다. 인간의 성행위 배후에는 프로이트가 말하는 ´도착적 리비도´가 존재한다고 전제한 뒤, 지은이는 인간이 정상적인 성교를 하기 위해서 동물이 하지 않는 이상한 짓을 한다고 합니다.

"가령 남자의 경우 여자에게 검은 스타킹을 신게 하거나 안경을 쓰게 한다거나, 스스로 여자의 속옷을 입는다든지, 혹은 여자의 유방을 세차게 빤다든가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든가 혹은 엉덩이를 꼬집는다든지 여자에게 수차례 성기를 꽉 쥐게 한다든지 하는 것이다.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아무것도 아닌 이런 행동이 남자에게는 성기가 발기하고 성교 가능한 상태가 되기 위한 필요 불가결한 조건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이 책 19쪽에서)

그러고 보니,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민음사 펴냄)에서도 정사를 벌일 때마다 중절모를 쓰는 여자 주인공이 나오는 게 생각나는군요.

이같은 성 도착을 막기 위한 노력의 흔적이 곧 인류의 성문화가 변천해 온 역사라고 지은이는 강조합니다. 일본의 프로이트 심리학자인 지은이가 이 책에서 서구의 성문화가 변천해온 과정을 바라보는 기본 관점입니다.

맨 먼저 지은이는 남자와 여자의 해부학적 차이에 따른 성 차별 현상을 살펴봅니다. 남자는 성적으로 흥분해야만 섹스가 가능한데, 여자는 흥분하지 않아도 섹스가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이같은 해부학적 차이라는 조건 자체가 성 차별의 원인은 아니지만, 사람은 성 본능이 고장났기 때문에 남녀의 성적 흥분의 형태와 시기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사람의 섹스가 정상적인 성교로부터 벗어나게 된 근원적 이유라는 이야기입니다.

매춘과 강간에 대해서도 이같은 해석이 이어집니다. 동물에게는 없고 인간 남자에게만 있는 매춘과 강간이라는 행위는 남자의 성욕이 자폐적 환상에 의해 성립되고, 여자를 성욕의 대상으로 찾게 되는 까닭이라는 해석입니다. 발정기와 무관하게 성욕의 대상으로서만 여자를 찾는 남자는 쉽사리 매춘이나 강간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야기의 흥미는 계속됩니다. 중간중간 붙여진 작은 제목만 훑어봐도 이 책의 흥미로움의 정도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남자 스트립쇼가 팔리지 않는 이유´ ´결혼도 매춘이다´ ´남자를 밝히는 여자는 괴롭다´ ´클린턴 대통령처럼´ ´무료 섹스의 박멸´ ´성교 강박증´ 등이 그런 제목들입니다.

얼핏 보기에 가벼운 성 에세이 정도로 읽힐 법 하지만, 프로이트 학파의 심리학자인 지은이는 성에 대한 다양한 관심사들을 하나의 분석 틀을 바탕으로 해석해냅니다. 성 문화의 변천을 살펴보며 그는 사람의 성욕의 배후에 숨어 있는 환상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적합한 영향력을 갖고 있느냐를 보자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적합하지 않은 환상임을 깨닫게 되면서부터 비로소 성의 해방에 대한 의식이 일어나는 것이라는 해석이 이어지는 것이죠. 즉 성 차별을 이끌어온 남자의 권력주의 따위는 이미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환상에 의한 것임을 명백히 밝히고 싶었다는 게 지은이가 이 책을 쓴 뜻이라고 합니다.

이제 차츰 성 차별이 깨뜨려지고 있는 상황에서 지은이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성 차별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뜻에서 이 책을 썼다고 마무리합니다. 이 책은 곧 인류 성 문화의 다양한 현상들 바탕에 깔린 환상을 분석하고, 그 결과인 성 차별을 무너뜨리기 위한 의도로 쓰여졌다는 이야기인 셈이지요. 한낮의 티타임에 벌이는 성 담론을 풍요롭고 건강하게 이끌어가기 위한 좋은 소재가 될 수 있을 만한 책입니다.

고규홍 Books 편집장 (gohkh@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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