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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신고도 못해주는 아빠···'미혼부 눈물' 대법이 닦아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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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민으로 태어난 아동은 태어난 즉시 ‘출생 등록될 권리’를 가진다”

대법원 1부(주심 권순일 대법관)가 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아동들의 '출생 등록 권리'를 최초로 인정하는 판결을 했다. 기존에는 미혼부가 홀로 아이의 출생 신고를 하려면 '아이 엄마의 이름이나 등록기준지, 주민등록번호를 알 수 없다'는 점을 관할 법원으로부터 엄격하게 확인 받았어야 했다. 대법원은 이런 하급심의 판단을 “아동의 사회적 신분을 박탈하고 인격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판결하며 해석의 폭을 넓혔다.

중국에서 귀화한 A씨는 중국 국적의 여성 B씨와의 사이에서 딸을 낳고 출생 신고를 하려 했지만 거부당했다. 혼외 자녀에 대한 출생 등록을 할 때 엄마가 하는 경우와 아빠가 하는 경우는 절차가 다르다. 엄마의 경우 출생했다는 사실만으로 모자 관계를 인정받을 수 있다. 반면 아빠는 ‘인지’라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인지는 혼외 출생 자녀를 생부 또는 생모가 자기의 자녀로 인정하는 신고를 말한다. 이때 아이가 다른 사람의 친생자가 아니라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아이 엄마의 혼인관계증명서도 내야 한다.

이 때문에 생모가 아이를 낳고 연락이 끊기면 아빠가 혼자 출생 신고를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생모가 출생 신고에 협조하지 않는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A씨 사례는 생모가 외국인이라는 신분상 혼인관계증명서를 발급 받을 수 없는 경우였다. A씨는 법원에 친생자 출생신고를 위한 확인을 받으려 했지만 1·2심서 거부당하자 대법에 재항고했다.

미혼부 출생 신고 가능케 한 ‘사랑이 법’

아이 엄마가 소재 불명이거나 출생 신고에 협조하지 않는 경우 미혼부가 홀로 출생 신고를 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중앙포토]

아이 엄마가 소재 불명이거나 출생 신고에 협조하지 않는 경우 미혼부가 홀로 출생 신고를 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중앙포토]

2015년 가족관계등록법 개정으로 미혼부도 혼자 출생 신고를 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긴 했다. 일명 ‘사랑이 법’(가족관계등록법 제57조 제2항) 이다. 미혼부 김지환(43)씨가 “딸 사랑이의 출생 신고를 하게 해달라”며 1인 시위를 이어와 통과된 법안이다(※5월 31일자 중앙일보 [밀실]“아이굶어죽을까 포기”…눈물쏟던 미혼부 마지막 전화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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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것도 쉽지 않았다. 법원이 '엄마의 성명·등록기준지·주민등록번호를 알 수 없는 경우'라는 법 조항을 엄격하게 해석했기 때문이다. 생모의 인적사항 중 일부라도 안다면 생모가 출생 신고를 하지 않은 채 아기를 두고 잠적해도 아빠 혼자 출생 신고하기는 어려웠다. 엄마의 소재를 알아도 엄마가 출생 신고에 협조하지 않으면 출생 신고를 못했다.

대법원은 이 조항에 대해 "문언 그대로 '엄마의 이름·주민등록번호·등록기준지 전부 또는 일부를 알 수 없는 경우'뿐만 아니라 엄마가 소재 불명인 경우, 엄마가 정당한 사유 없이 출생 신고에 필요한 서류 제출에 협조하지 않는 경우도 해당한다고 봐야 한다”고 판결했다. 또 이 사건처럼 “엄마가 외국인이어서 자신이 책임질 수 없는 이유로 출생 신고에 필요한 서류를 갖출 수 없는 경우도 포함한다”고 판시했다. 좋은 취지로 도입된 사랑이 법이 아동의 권리를 실효성 있게 보호하지 못한 허점을 메운다는 취지다.

‘서류상으로는 없는 아이’ 사라질까

이날 대법원 판결로 앞으로 미혼부가 출생 등록을 위해 가정 법원의 확인을 받는 절차가 보다 쉬워질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은 "사회적 신분 취득은 출생 신고가 시작"이라며 "대한민국 국민으로 태어난 아동은 태어난 즉시 '출생 등록될 권리'를 가진다"고 판결문에 썼다.

한 현직 판사는 "입법 이외에는 방법을 찾기 어려운 사례로 생각했는데 상당히 의미 있는 판결"이라며 "아동의 권리를 큰 폭으로 넓혔다"고 말했다. 대법원 판결 소식을 들은 김지환 아품(한국미혼부가정지원협회) 대표는 “가슴이 벌렁벌렁 뛴다”며 심경을 전했다. 김씨는 “늦게나마 대법원에서 아이들의 권리를 인정해 줘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이수정·박태인기자 lee.sujeo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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