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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 SW 시장에 대기업 참여 규제…후진하는 ‘전자정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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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9호 13면

교육부는 최근 학생의 성적 처리와 출·결석, 학사일정 등 교육행정을 처리할 전산시스템인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이하 나이스)’ 구축을 1년 연기하기로 했다. 당초 2022년 나이스 개통을 목표로 했지만, 부처 간 불협화음으로 시스템 구축 발주가 지연된 때문이다. 교육부는 “미래 교육 지원과 한국판 뉴딜 사업 등을 반영, 나이스 계획을 다시 짤 계획”이라고 밝혔다.

교육행정정보시스템 ‘나이스’ 구축 #과기부서 대기업 참여 불허해 연기 #발주처 “기술력 갖춘 대기업 원해” #공공 SW 개발 안 해 생태계 붕괴 #중소기업 경쟁력 강화 취지 퇴색 #대기업 실적 못 채워 수출도 막혀

교육부는 앞서 지난해 12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나이스 구축 사업에 대기업이 참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현행법상 나이스와 같은 공공 소프트웨어(SW) 구축 사업엔 사실상 대기업이 참여할 수 없다. 중소기업 육성을 위해 2013년 규제를 대폭 강화(공공 SW 대기업 참여 제한 제도)한 영향이다. 대기업이 참여하려면 과기부가 허용해야 하는데, 과기부는 교육부의 요청을 불허했다. 나이스는 전국 초·중·고 학생의 학적을 관리하는 핵심 시스템인 만큼 교육부는 대기업 참여가 불가피하단 입장이다.

관련업계, 규제 완화 등 제도 보완 목소리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디지털 뉴딜’을 앞세운 한국형 뉴딜 사업을 앞두고 공공 SW 대기업(상호출자제한기업) 참여 제한 제도를 손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정부는 2010년대 들어 대기업이 공공 SW 시장을 싹쓸이하자 2013년 1월 규제를 대폭 강화해 신규 사업에 사실상 대기업 참여를 막았다. 중소기업의 자생력을 키우겠다는 고육책이었다. 하지만 ‘전자정부’ 시대에 역행하는 제도라는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오재인 단국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 측면에선 바람직하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갖춘 국내 대기업이 한국형 뉴딜 사업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초기 단계부터 각 사업이 힘을 잃을 수 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관련 업계에선 중소기업 경쟁력 강화라는 애초 취지가 퇴색하고, 시장 왜곡이 심화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13년 규제 강화 이후 공공 SW 사업에 주력한 중견기업의 영업이익률은 적자거나 0.2~1.6% 수준으로, 전체 정보통신기업 평균 영업이익률 6.4%보다 턱없이 낮다. 특히 중견기업 9개사의 공공 SW 시장 점유율이 50%가 넘는데, 이들 기업의 공공부문 매출은 규제 강화 이후 크게 늘어난 반면 민간부문 매출은 크게 감소했다. 한경연은 이에 대해 “대기업이 빠진 자리를 소수 중견기업이 과점했고, 공공부문 수주 경쟁에 매몰돼 경쟁력을 잃었다는 의미”라고 평가했다.

공공 SW 시장의 생태계도 무너지고 있다. 공공 SW 시장은 2013년 이후 연평균 5.5% 성장했지만, 2013년을 기점으로 신규 개발보단 유지관리 비중이 더 커졌다. 발주처가 신규 시스템 구축보다는 기존의 낡은 시스템을 최대한 고쳐 쓰고 있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업계의 한 관계자는 “중소기업의 기술력도 많이 좋아졌지만, 부실화한 사업이 적지 않다”며 “교육부 등 발주처는 기술력을 갖춘 대기업에 일을 맡기고 싶어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하니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지 않고 기존 시스템을 고쳐 쓰는 데 머물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규제 강화는 수출 발목도 잡았다. 공공 SW 수출 실적은 2015년 5억3403억 달러로 정점을 찍은 뒤 급감했다. 2018년엔 수출액이 2억5832만 달러에 그쳤다. 임동원 한경연 부연구위원은 “해외 발주처 중엔 최근 3년간 유사사업 실적으로 사전 적격검사를 진행하는 곳이 많다”며 “중소기업은 기술력이 없어서, 대기업은 기술력을 갖췄지만 유사사업 실적을 채우지 못해 입찰하지 못하는 예가 많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선제적으로 공공 SW 사업을 발주하면, 기업이 이 사업을 수행하면서 확보한 노하우와 기술력을 바탕으로 세계 시장에 진출하는 선순환 구도가 깨졌다는 평가다.

중기는 기술력 부족 반박, 규제 강화 주장

이 때문에 정부도 지난해 ‘서비스산업 혁신 전략’에 공공 SW 제도 개선 내용을 담고 규제 완화를 추진했지만,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입장차가 극명해 여전히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중소기업은 기술력 등 경쟁력 부족 문제에 반론을 제기한다. 난도 높은 차세대 사업은 누가 해도 어려운 사업인데, 중소기업의 기술력 부족으로 몰고 가는 건 억울하다는 것이다. 또 수익률이 낮은 건 경쟁력 문제가 아니라 예산 절감을 우선하는 공공기관 특유의 문화 때문이라고 반박한다.

특히 중견기업은 되레 규제를 더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는 국방·치안이나 ICBMA(IoT·클라우드·빅데이터·모바일·AI)와 같은 신사업 분야에 한해 대기업 참여를 허용하고 있는데, 이를 너무 광범위하게 적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대기업 참여 예외 신청 41건 가운데 26건(63%)이 예외 인정을 받았다.

중견기업은 “예외 조항은 중소기업의 기술력 부족에 대비하는 취지인데 대기업의 사업 참여 우회로가 되고 있다”며 최근 정부에 규제 강화 내용을 담은 건의서를 전달했다. 중소기업은 입장이 또 다르다. 신규 사업에 중견기업과 컨소시엄으로 참여하는 예가 많은데, 이 과정에서 중견기업이 자신의 이권만 챙긴다는 것이다. IT 업계의 한 관계자는 “중견기업이 중소기업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자신들의 이권만 챙긴다는 불만이 팽배하다”고 전했다.

오 교수는 "우리나라의 전자정부 경쟁력 강화를 위해선 지금이라도 규제를 2013년 이전으로 되돌려야 한다”며 "다만 대기업과 중소기업 상생을 위해 대기업 갑질 방지 장치 등 여러 방안을 제도화하면 된다”고 말했다.

황정일 기자 obidiu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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