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분수대

이태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9면

장혜수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에디터
장혜수 스포츠팀장

장혜수 스포츠팀장

공무 목적으로 여행하는 관리 등에게 마필과 숙식을 제공하기 위해, 조선 시대 주요 길목에 설치했던 시설이 역원(驛院)이다. 마필을 공급하는 곳이 역, 숙식이 원이다. 역원은 둘을 합친 것이다. 한성 도성 인근에 네 개의 원이 있었다. 서울 남산을 기준으로, 동쪽 전곶원, 서쪽 홍제원, 남쪽 이태원, 북쪽 다락원 등이다. 역원 주변에는 자연스레 마을이 형성됐다. 마을 이름도 역원 이름을 가져다 썼다. 홍제원과 이태원은 지금도 그 이름을 쓴다.

조선 전기 문인 성현(1439~1504)은 『용재총화』에서 이태원을 몇 차례 언급했다. 그는 오얏(자두)나무를 뜻하는 ‘李’자를 써 ‘李泰院’으로 적었다. 반세기 뒤인 중종 때 간행된 『신동국여지승람』에는 배나무를 뜻하는 ‘梨’자를 써 ‘梨泰院’으로 나온다. 남산 남쪽의 볕과 물이 좋은 곳이니, 오얏나무든 배나무든 잘 자랐을 것이다. 조선 후기 기록에는 ‘異胎院’이라는 또 다른 한자어가 나온다. ‘배(胎) 다른(異) 사람이 사는 곳’ 쯤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유원(1814~1888)의 『임하필기』에 ‘남문 밖에 또한 이태원(異胎院)이 있는데, 임진년(1592년) 뒤에 왜인(일본인)들을 이곳에 옮겨 두고 인하여 이름을 삼았다’고 나온다. 이태원이 외국인과 연을 맺은 건 그 무렵부터다.

1882년 임오군란을 진압하러 조선에 온 청나라 군대는 이태원에 주둔했다. 일본강점기에는 그곳에 일본군 조선사령부가, 해방 후에는 미8군 사령부가 차례로 자리 잡았다. 미군을 위한 위락시설이 주변에 들어섰다. 1980년대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거치면서 한국을 찾는 외국인이 급증했다. 이태원은 쇼핑과 위락을 위해 이들이 꼭 들르는 명소가 됐다. 심야 영업 금지 시절, 관광특구 이태원은 외국인뿐 아니라 내국인도 즐겨 찾는 일종의 해방구였다.

안정세에 접어드는 듯했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다시 확산세로 돌아선 모습이다. 감염자가 거쳐 간 이태원 클럽과 주점을 거점으로 해, 바이러스가 전국으로 퍼져가는 분위기다. 조선 시대 기근이 들거나 역병이 돌면, 백성을 구휼하고(賑) 환란을 다스리는(濟) 시설인 ‘진제장(賑濟場)’을 설치했다. 이태원은 한성에서 진제장을 설치했던 대표적인 지역이었다. 그랬던 곳이 감염병의 새로운 확산지가 됐다. 시절의 아이러니다.

장혜수 스포츠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