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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경 방북 문건' 논란의 160쪽···봉인 풀려도 왜 공개 않나

중앙일보

입력

외교부가 1994년 도입한 외교문서 공개제도는 현대 외교사의 사초(史草)를 들여다볼 기회다. 30년을 기한으로 전 세계 공관에서 보고한 전문까지 공개하는 만큼, 당대 외교 활동의 말초 신경까지 생생하게 읽을 수 있어서다.

외교부는 올해 1988~89년도에 생산된 문건 24만여건을 공개했다. 이 가운데 '임수경 무단방북 사건(1989년)' 관련 문건이 비공개 결정돼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일각에서는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 등 정권 실세와 직접 연관된 사건이라 비공개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조동준 서울대 교수가 4일 오후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조동준 서울대 교수가 4일 오후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올해 외교문서공개 심의위원이었던 조동준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이에 대해 “지나친 정파적 해석”이라고 선을 그었다. 조 교수는 2017년 5월 문 정부 출범 무렵 심의위원으로 지명돼 올해로 3년 임기를 마쳤다. 유일한 학계 위원으로, 외교부 전직 대사 5~6명으로 구성된 예비심사위원들이 공개·비공개 여부를 심사한 내용을 2차로 검토하는 역할이었다. 지난 1일과 4일 조 교수를 서울 관악구 신림동 연구실에서 만났다.

올해 임수경 방북 문건은 왜 비공개했나.
관심이 될 만한 내용은 약 160쪽 중에서도 일부다. 가장 큰 건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의 큰 그림과 관련한 내용 때문이다. 현재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당시 한국 정부의 대(對)공산권 외교, 대북한 외교 전략이 담겨 있다. 이게 지금 공개되면 북한뿐 아니라 중국 등 주변국이 반발할 수 있고, 미국과 이를 논의한 내용도 있어 실체 규명보다는 외교적으로 문제가 될 소지가 커 보였다. 문서를 검토한 예비심사위원들과 나의 판단이 전원 일치했다.
1989년 8월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임수경씨(가운데 빨간 티셔츠)가 민간인 최초로 판문점을 걸어 귀환하고 있다. 오른쪽은 임씨를 돕기 위해 방북했던 문규현 신부. [중앙포토]

1989년 8월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임수경씨(가운데 빨간 티셔츠)가 민간인 최초로 판문점을 걸어 귀환하고 있다. 오른쪽은 임씨를 돕기 위해 방북했던 문규현 신부. [중앙포토]

외교부는 처음 비공개 사유로 “개인정보 사안”임을 들었다. 임수경 전 의원이나 임종석 전 실장이나 모두 공인이어서 해명이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었다.
해당 문건에 임종석·임수경 씨 외에 그 일을 담당했던 국가안전기획부 직원들과 그들의 해외 파트너들이 언급돼 있다. 실체와 관련 없는 내용이다. 임수경·임종석 씨와 관련한 핵심적인 자료도 현재의 국정원이나 검찰이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7, 80년대 외무부(현 외교부)는 안기부 또는 중앙정보부를 위해 움직이기도 했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난 뒤 국제 여론 관리 등 ‘뒷수습’을 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 현대사의 아픈 현실이다.”
공개, 비공개 결정의 기준은. 
국민의 알 권리와 외교 문제 소지가 될 수 있는 것 중에 어느 쪽이 크냐를 본다. 과거 문서를 통해 한국의 속내가 드러나면 지금 활동하는 외교관들은 상대국에 패를 보인 채 활동하는 게 된다. 예를 들면 2028년쯤 한·일 대륙붕 공동개발 협정(1978년 발효)을 재협상해야 해 그와 관련한 자료는 전부 비공개다. 한·미 주둔군 지위협정(SOFA)처럼 공개하지 않기로 약속한 것도 국가 간 신의 문제가 있어 비공개한다.
연간 외교문서 공개율이 80% 정도인데 무조건 많이 공개한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현 정부가 특정 정부에 대한 치부를 드러내는 데 활용할 수도 있고, 사료를 통해 당대 한국·미국의 외교 전략이 주변국에 노출될 수 있다. 국익과 알 권리 사이에 균형점을 찾는 게 필요하다.

조 교수는 인터뷰 말미에 문서·구술을 망라한 외교 사료 관리의 구조적인 문제도 지적했다.

조동준 서울대 교수가 4일 오후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조동준 서울대 교수가 4일 오후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공개제도와 관련해선 어떤 개선점이 필요한가.
정파성 논란을 피하는 게 어려우면서 가장 중요한 문제다. 임기를 마치며 좌ㆍ우가 합의한 인사들로 구성된 위원회를 만들어 그간 비공개한 문건을 재검토해보자는 의견을 냈다. 전문 사서를 둔다면 국제 정치학, 한국 현대사·정치에 고루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어야 하고, 학자라면 학계에서 정파적 이력이 덜한 사람이어야 한다.
외교문서 기밀해제는 30년을 기다려야 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같은 최근 사안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민감한 내용일수록 문서로 안 남길 수 있다. 구술사(oral history)가 중요한 이유다. 다만 단순 회고록은 자기 자랑이 되거나 공개해서는 안 되는 내용까지 마구 포함된다. 앞서 말한 전문가가 듣고 기록해야 한다. 국립외교원에서 2013년 무렵부터 퇴직한 대사들의 외교 경험을 구술로 정리한 책을 발간해왔는데 이 정부 들어 작업이 멈췄다. 안타까운 일이다. 현직 외교관들의 노하우, 현장 지식은 귀중한 국가의 자원이다.

이유정 기자 uu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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