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임재준의 의학노트

의대생의 자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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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임재준 서울대 의대교수·의학교육실장

임재준 서울대 의대교수·의학교육실장

의대 인기가 식을 줄을 모른다. 이과에서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 중 열에 일곱 여덟은 의대를 지망한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니 우리나라 어느 의대든 전국 상위 1%의 학생들로 채워져 있다고 해도 많이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공부를 잘하는 것만으로 의대생의 자격을 갖춘 것은 아니다.

의대 입학은 노력의 결과지만 #좋은 환경 만난 행운덕도 있어 #안정된 호구지책만 좇기보다 #의무와 특권 감당할 준비돼야

우리가 흔히 ‘소아마비’라고 부르는 병은 ‘폴리오 바이러스’가 우리 신경계를 침범해서 생긴다. 대부분 살짝 앓고 지나가지만, 간혹 바이러스가 척수를 침범하여 몸의 일부를 움직이지 못하게 될 수 있고, 드물게는 숨뇌가 망가져 숨을 쉬지 못하게 되기도 한다. 이 바이러스는 세계적으로 박멸 직전이지만, 아주 오랜 기간 인류를 괴롭혀왔다.

1952년,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대규모 폴리오 바이러스 감염이 발생했다. 유행 기간인 5개월 동안 전염병 전문인 블레담 병원에 입원 치료받은 환자가 3000명 정도나 됐다. 한창 번질 때는 매일 50명씩 입원했다고 한다. 코로나19 확진자가 쏟아져나오던 지난 3월 초 대구 병원들의 상황과 많이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숨뇌까지 바이러스가 번져 숨을 잘 쉬지 못하게 된 환자들이 매주 수십 명씩 입원하고, 결국 대부분이 사망하자 의료진은 말 그대로 공황 상태에 빠지게 됐다. 사태가 계속 악화되자 책임자였던 헨리 래슨 교수는 마취과 의사인 비욘 웁슨 박사의 조언을 구했다. 그는 기관절개술로 기도를 확보한 후 앰부백(공기를 짜내면 저절로 부풀어 오르는 주머니)에 연결하고 이를 눌러 짜는 방식으로 인공호흡을 시도하자는, 당시로써는 혁명적인 아이디어를 냈다. 동료들은 반신반의했지만 웁슨 박사는 숨을 쉬지 못해 생사의 기로에 있던 ‘비비’라는 이름의 12살짜리 여자아이를 맡아 성공적으로 살려냈다. 결국 래슨 교수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모든 환자에게 이 방법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가장 어려운 문제가 남아있었다. 누가 수많은 환자들 옆에 앉아 밤을 새워가며 앰부백을 손으로 눌러 짤 것인가?

의학노트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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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장면에서 의대생들이 등장한다. 의대생 1500명이 이 일을 맡겠다고 나선 것이다. 네댓 명의 학생들이 환자 한 명을 맡아 번갈아 앰부백을 눌러 짜며 바이러스의 공격이 가라앉아 스스로 숨을 쉴 수 있게 될 때까지 환자의 곁을 지켰다. 어린 환자를 맡으면 비번인 학생들이 책을 읽어주거나 게임을 함께 하며 환자들을 격려했다고 한다. 사실 앰부백은 20~30분만 짜도 손에 쥐가 날 지경으로 힘들어진다. 그런데 학생들은 1시간에 10분씩 쉬어가며 8시간씩 돌아가며 환자를 지켰다니 그들의 의지와 헌신은 정말 놀랍다. 당시 의대생이었던 우페 키어크 박사는 그때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부어오르고 물집 잡힌 손가락이 아니라, 불 꺼진 병실에서 밤새 앰부백을 짜며 호흡을 도왔는데 동이 터 환자가 밤사이 사망한 것을 알게 됐을 때였다고 회고했다.

미국에서 코로나 감염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자, 미국의과대학협회는 지난 3월 19일 의대생들과 환자의 접촉을 당장 전면 중단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학생들의 안전에 대한 고려와 함께 의료진이 사용해야 할 마스크 등의 개인보호 장비가 부족해질 것을 감안한 결정이었다. 그러자 의대생들은 코로나 정보 센터에 자원하거나 병원에서 사투를 벌이는 의료진의 아이나 강아지를 돌봐주는 봉사를 시작했다. 한편 펜실베이니아 의대생인 데이빗 밀러는 친구들과 함께 미국의과대학협회 결정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칼럼을 ‘내과학연보’에 기고했는데, 내용은 간단했다. 학생들도 기여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외래 진료를 도울 수 있고, 일반 입원 환자의 진료에도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환자를 돌볼 의사가 부족해져 은퇴한 의사들이 병원으로 돌아와 환자를 돌보고 있지만, 혹시 감염될 경우를 생각한다면 젊은 자신들이 낫다는 것이다.

의대에 입학할 정도로 우수한 실력은 물론 자신이 열심히 노력한 결과겠지만, 우연히 타고난 소질이나 좋은 환경의 덕도 많이 보았음이 분명하다. 이런 행운을 누린 의대생들이라면 언제라도 환자를 도와야 한다는 의무와 도울 수 있는 특권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혹시라도 최고의 수재들이 그저 안정된 호구지책을 좇아 의대를 선택한 것이라면 우리나라의 미래가 너무 서글프지 않은가.

임재준 서울대 의대교수·의학교육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