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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몸에 불지른 남편…법정서 무릎꿇어도 딸은 용서못했다

중앙일보

입력

이씨가 사건 발생 날 피해자에게 보낸 문자. [사진 피해자 딸]

이씨가 사건 발생 날 피해자에게 보낸 문자. [사진 피해자 딸]

지난 23일 오전 10시 수원지법 성남지원 3호 법정. 얼굴과 팔 등에 화상 자국이 있는 한 남성이 재판정에 들어서자마자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아직 화상 치료를 덜 마친 듯 한손엔 붕대도 감겨있었다. 판사 말에 따라 가끔 머리를 조아리기도 했다. 아내에게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여 살해한 혐의 등을 받는 이모(62)씨다.

이혼 요구한 아내에게 방화 살해로 반응한 남편 

이씨가 피해자에게 보낸 문자들. [사진 피해자 딸]

이씨가 피해자에게 보낸 문자들. [사진 피해자 딸]

이날 판결문에 따르면 사건 개요는 이렇다.
이씨는 2013년 7월 피해자 A씨(61·여)와 재혼해 충남 서천군과 공주시에 있는 모텔 2곳과 펜션을 운영하며 함께 지냈다. A씨가 느낀 재혼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경제적 어려움과 고된 일상 등을 이유로 이씨와 이혼하기로 마음먹은 A씨는 지난해 8월 2일 이씨를 떠나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 있는 A씨 작은딸 집으로 왔다.

이혼을 요구하며 집을 떠난 아내에게 화가 난 이씨는 A씨와 그의 딸을 협박하기 시작했다. 휴대전화를 끄고 이씨를 피해 다니는 A씨에게 “나를 살인자를 만들고 살인하게 만들고 해. 내가 보복할 일만 남았어” 등의 통화 녹음을 남겼다. A씨와 연락이 닿자 “휘발유를 당신 몸에다 뿌리고 나도 뿌리고 그냥 다 태워버리고 가겠다”는 말도 했다.

사건 당시 현장 모습. [사진 경기소방재난본부]

사건 당시 현장 모습. [사진 경기소방재난본부]

사건이 있던 날 약 두시간 전인 지난해 9월 17일 오후 9시 50분에는 “나 지금 분당 간다”는 내용의 문자 메시지와 함께 ‘내 운명 통에’라는 글을 적은 휘발유통 사진을 A씨에게 보냈다. 이후 차를 끌고 충남에서 분당으로 온 이씨는 당일 자정이 지난 시각 A씨와 그의 딸을 집 근처 길거리에서 만났다.

“단둘이 얘기하고 싶으니 들어가라”는 말에도 A씨의 딸이 자리를 뜨지 않자 격분한 이씨는 차로 가 미리 준비한 휘발유통과 라이터를 꺼내 왔다. 이후 A씨 몸과 머리에 휘발유를 부었고 도망가는 A씨를 쫓아가 불을 붙였다. 딸에게도 얼굴과 상반신에 휘발유를 뿌리고 휘발유통을 던지는 등 딸을 폭행했다. 결국 A씨는 사건 발생 약 3주일 만인 지난해 10월 11일 전신 3도 화상으로 인한 패혈증 쇼크로 숨을 거뒀다.

의붓딸 앞에서 아내 숨지게 한 60대 징역 25년 

A씨 딸이 이달 3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이씨 엄벌을 촉구하며 올린 글. [사진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 캡처]

A씨 딸이 이달 3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이씨 엄벌을 촉구하며 올린 글. [사진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 캡처]

살인과 폭행 혐의로 기소된 이씨에게 수원지법 성남지원 제1형사부(부장 이수열)는 징역 25년을 선고했다. 이씨와 변호인은 재판에서 방화목적이 없었으며 우발적 범행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 사건은 피고인의 준비와 계획에 의한 범죄로, 그 결과가 중하고 방법 또한 잔혹해 죄질이 매우 불량하다”고 판시했다.

이어 “피해자가 피고인에게 이혼을 요구했다는 점 외에는 별다른 범행 동기를 찾기 어렵다. 유족이 엄벌을 원하는 점,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한 딸이 감당하기 어려운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는 점 등을 고려했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선고가 끝나자 유가족은 울음을 크게 터트렸다. 재판이 끝나자 사건의 직접적인 피해자이자 유가족인 A씨의 딸은 “뒤늦은 반성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피해자 유가족을 생각한 판결인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1심 선고 전인 지난 21일 중앙일보와 만난 A씨의 딸은 “눈앞에서 불에 타는 엄마를 보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면서 “엄마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매일 시달리고 있다. 이씨가 나 때문에 이런 범행을 저질렀다고 하는데 그 말이 계속 마음에 남는다”며 눈물을 쏟았다.

딸이 기억하는 A씨는 사랑이 넘치던 엄마였다. 첫 번째 남편과 이혼 후 일본인 관광 가이드 등을 하며 20년간 두 딸을 홀로 키웠으며, 이씨와 재혼 후 떨어져 살 때도 하루도 빠짐없이 연락하며 딸을 살뜰히 챙겼다고 한다. A씨의 딸은 사건 후 삶을 묻자 이렇게 말했다.

“이런 불행이 나에게 닥칠 줄은 몰랐죠. 엄마가 갑자기 떠난다는 생각을 누가 하고 살겠어요. 나를 사랑해주고 매일 연락하던 엄마가 없다는 거 말고는 달라진 건 없어요. 엄마와 주고받았던 대화들은 아직도 다 그대로인데 엄마만 없네요.”

채혜선 기자 chae.hyes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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