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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고도 못믿을 트럼프 "살균제 주입해 코로나 치료" 발언 배경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3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살균제 인체 주입 치료' 발언에 대해 해명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신 같은 기자들을 비꼬기 위해 한 말"이라고 말했다. [로이터=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3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살균제 인체 주입 치료' 발언에 대해 해명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신 같은 기자들을 비꼬기 위해 한 말"이라고 말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24일(현지시간) 미국 보건당국에 살균제 관련 전화 문의가 빗발쳤다. 살균제를 잘못 먹었다는 사람, 먹어도 되느냐는 질문까지 다양했다.

[박현영의 워싱턴 살롱] #트럼프 '살균제 인체 주입 코로나19 치료' 발언에 #살균제 관련 사고 급증…"절대 먹으면 안 돼" 경고 #NYT "나 홀로 집에 트럼프, 재선 실패 불안감" #골프·친구·외유·방문객 끊긴채 자택대기에 고립감 #'아군' 폭스뉴스도 코로나19 대응 비판하자 분노 #유세 대신으로 삼던 언론 브리핑도 이젠 못하게 될 판

뉴욕시 독극물통제센터는 이날 오후 3시까지 18시간 동안 살균제 관련 사고 30건이 접수됐다고 밝혔다. 메릴랜드주 위기관리팀 핫라인으로는 관련 전화가 100통 넘게 걸려왔다.

전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브리핑에서 '살균제를 몸에 주입해 코로나19를 치료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한 발언의 후폭풍이다. 미국이 발칵 뒤집혔다.

급기야 관련 부처인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와 환경보호청(EPA)이 살균제를 인체에 사용하거나 삼키면 안 된다는 경고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살균제 브랜드인 리졸과 데톨을 생산하는 영국 회사 레킷벤키저는 "어떠한 경우에도 살균 제품이 인체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성명을 발표해야 했다.

미국인이 많이 쓰는 살균제 브랜드 리졸을 만드는 영국 회사 레킷벤키저는 23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살균제 인체 주입 치료' 발언 이후 "무슨 일이 있어도 살균제를 먹거나 주입하면 안 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AFP=연합뉴스]

미국인이 많이 쓰는 살균제 브랜드 리졸을 만드는 영국 회사 레킷벤키저는 23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살균제 인체 주입 치료' 발언 이후 "무슨 일이 있어도 살균제를 먹거나 주입하면 안 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AFP=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은 3월 중순 이후 코로나19 브리핑을 직접 열고 있다. 이 자리에서 여러 차례 실언과 허위 주장을 했지만, 살균제 발언 충격파가 가장 컸다.

당장 이날 브리핑은 준비한 원고를 읽은 뒤 기자 질문을 받지 않고 20여분 만에 끝냈다. 25일에는 브리핑 일정을 잡지 않았다. 연이틀 브리핑을 건너뛰는 건 이례적이다.

일간 가디언은 "트럼프의 기괴한 살균제 발언이 그의 행정부에 충격을 줬다는 신호"라고 평가했다. 트럼프가 앞으로는 브리핑에 매일 참석하지 않거나 참석하더라도 잠시 머물다가 퇴장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온라인 매체 악시오스가 보도했다.

발언 이튿날 '왜 그런 말을 했느냐'는 질문에 트럼프 대통령은 "당신 같은 기자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보기 위해 비꼬는 질문을 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3일(현지시간) 백악관 코로나19 브리핑에서 빌 브라이언 국토안보부 국장을 향해 살균제를 인체에 주입해 코로나19를 치료하는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3일(현지시간) 백악관 코로나19 브리핑에서 빌 브라이언 국토안보부 국장을 향해 살균제를 인체에 주입해 코로나19를 치료하는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하지만 브리핑 동영상을 되감아 보면 해명이 거짓임을 알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살균제 인체 주입 가능성' 발언을 기자들에게 한 게 아니라 연단에서 발표를 마친 빌 브라이언 국토안보부 과학기술국장에게 했다.

브라이언 국장이 바이러스가 고온 다습한 환경에 약하고 살균제에 노출되면 빨리 죽는다는 연구 결과를 소개하자 환자에게 자외선이나 강력한 햇볕을 쬐게 하거나 살균제를 몸에 넣는 방안을 검토해 보라고 말했다.

배석한 데버러 벅스 백악관 코로나 태스크포스(TF) 조정관에게는 이런 연구를 본 적 있느냐, 해 보면 어떻겠냐며 의견을 제시하고 동의를 구하는 형식이었다.

미국은 코로나19 환자가 94만 명, 사망자 5만 명 넘게 발생한 세계 최대 피해국이다. 바이러스 관련 정보와 정부 대응을 실시간으로 제공하겠다며 시작한 백악관 브리핑이 잘못된 정보를 퍼트리는 온상이 되자 이제 그만할 때가 됐다는 여론이 백악관 내부에서 나오고 있다.

듣고도 믿을 수 없는 발언을 트럼프 대통령은 왜 하게 됐을까. 최근 뉴욕타임스(NYT)가 자세하게 보도한 트럼프 대통령의 하루를 따라가 보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트럼프도 미국 대부분 지역에 내려진 자택대기명령을 따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열성 지지자, 친구 등 '아군'과 만남이 단절된 지 오래다. 공식 일정이 중단되면서 방문객도 없다. 주말이면 플로리다주 마러라고 리조트에 내려가 즐기던 골프, 미국 전역을 돌며 펼치던 대선 유세도 할 수 없게 됐다.

좋아하던 국내외 출장과 유세, 골프 일정이 사라지면서 밤낮으로 많은 시간을 TV 시청에 쏟고 있다. 오전 5시쯤 일어나 폭스뉴스와 CNN, MSNBC를 훑고, 앤드루 쿠오모 뉴욕 주지사의 코로나19 정례 브리핑도 챙겨 본다. 정오가 다 돼서 집무실에 나타난다고 한다.

TV를 좋아하지만, 방송을 보는 그의 심기는 불편하다. CNN은 말할 것도 없고, 친(親) 트럼프 매체인 폭스뉴스도 이따금 대통령의 코로나19 대응을 비판하기 때문이다. 재선 가도에서 가장 든든한 발판이라 믿었던 경제는 지난 10년 치 성장을 모두 반납했다. 지난 5주간 미국인 2600만 명이 실직했고, 2분기 성장률은 마이너스를 예고하고 있다.

'가짜 뉴스'라며 일부 언론을 맹비난하지만, 그는 신문도 읽는다. 언론이 자신의 코로나 대응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그리고 역사에 어떤 모습으로 그려질지에 대해 몰두하고 있다고 백악관 관계자들이 NYT에 전했다.

NYT는 최근 그와 대화를 나눈 친구들을 인용해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할지도 모른다고 불안해하고 걱정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트럼프에게 비공식적으로 경제 문제를 자문하는『트럼프노믹스』의 저자 스티븐 무어는 "대통령이 초조해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일부 경합주에서 트럼프 대통령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다. 최근 폭스뉴스 여론조사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미시간과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조 바이든 민주당 대통령 후보에게 8%포인트 차이로 지고 있다.

퀴니피액 여론조사에 따르면 플로리다주에서 트럼프는 바이든에게 4%포인트 차로 밀리고 있다. 지지자들을 달래기 위해 이민제한 행정명령에 서명하고 영주권 발급 잠정 중단을 발표했지만 역부족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4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코로나19 브리핑을 하고 있다. 언론사들이 유튜브 등을 통해 생중계하는 브리핑은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대선 유세 대신 유권자를 만나는 방법이다. [로이터=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4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코로나19 브리핑을 하고 있다. 언론사들이 유튜브 등을 통해 생중계하는 브리핑은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대선 유세 대신 유권자를 만나는 방법이다. [로이터=연합뉴스]

코로나19와 싸우느라 좌충우돌하는 사이 어느새 대선이 6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10인 이상 모임 금지로 대규모 유세를 열 수 없는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코로나19 브리핑을 대선 유세처럼 활용하기 시작했다.

폭스뉴스 등 방송이 생중계하고, 2시간 이상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세와 코로나 브리핑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규모 유세에서 특유의 유머와 막말, 개인기로 유권자들을 사로잡는 '기술'을 대국민 코로나19 브리핑에서 시도하다가 너무 나간 것일 수도 있다.

백악관 코로나 TF 회의는 매일 오후 마이크 펜스 부통령 주재로 열린다. 마치는 대로 오후 5시께 언론 브리핑을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TF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TF가 회의에서 논의한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브리핑에 들어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TF 회의를 마치면 멤버 가운데 한 명이 내용을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발표문을 전달하는데, 그마저도 샤프로 수정하고 읽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전문가를 불신하는 태도, 코로나19 역시 자신이 가장 잘 안 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화를 불렀다.

백악관에서 '나 홀로 집에' 신세가 된 트럼프 대통령이 고립감과 재선 실패에 대한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상황을 악화시켰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워싱턴=박현영 특파원 hy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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