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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서 25억 환전"···돈다발 들고 꼭꼭 숨은 라임 '회장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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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연합뉴스TV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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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또 바뀌었네.” 지난 3월 12일 서울 명동에서 만난 고령의 한 사채업자는 ‘회장님’ 지시로 수표 뭉치를 현금으로 바꾸러 온 한모(36)씨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씨는 라임자산운용 환매 중단 사태의 ‘주범’으로 꼽히는 이종필 전 라임 부사장과 스타모빌리티 실소유주 김봉현씨의 수행비서 역할을 한 사람이다.

이날 사채업자로부터 원화 12억원, 달러 12억원을 받은 한씨는 김씨 측근에게 곧바로 전달했다. 검찰은 이 돈이 김씨의 도피 자금으로 사용되고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사채업자의 말처럼 김씨의 ‘돈 세탁’에 나선 사람은 한씨 뿐만이 아니었다. 확보한 도피 자금 역시 수십억원을 훌쩍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라임 사태의 주요 피의자인 이 전 부사장은 지난해 11월 14일부터, ‘회장님’ 김씨는 지난해 12월 25일부터 도주 중이다. 수사기관은 특별검거팀을 꾸려 이들의 행방을 파악하고 나섰지만 4~5개월이 지난 현재까지 뚜렷한 소재지를 찾아내지는 못했다. 경찰 관계자는 “작정하고 숨은 피의자를 찾아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번 건은 특히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파악된 도주 자금만 수십억원 

이종필 전 라임자산운용 부사장. 뉴시스

이종필 전 라임자산운용 부사장. 뉴시스

이들의 검거가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이 전 부사장과 김씨 모두 이미 두둑한 현금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용카드 사용 내역과 같은 돈의 흐름을 파악해 소재를 찾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수사기관이 한씨를 통해 파악한 것만으로도 김씨는 24억원을, 이 전 부사장은 5억원을 현금으로 갖고 있다. 현재 수사 중인 다른 사건까지 고려하면, 확보한 도주 자금은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씨는 검찰 조사에서 “100억원도 사채업자 등을 통해 처리(현금으로 환전)한 적이 있다”며 “이 사람들이 굴리는 돈에 비하면 30억원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 부사장과 김씨를 잘 아는 업계 관계자는 “그들의 성격상 고급 호텔이나 리조트에서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머무르며 호화롭게 생활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 전 부사장은 도피 기간 중인 지난 1월 말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의 한 리조트에서 휴가를 보내기도 했다.

'회장님' 김씨, 연락은 텔레그램·와츠앱으로만

또 김씨와 이 전 부사장은 차명폰이나 대포폰을 사용했는데, 그마저도 추적이 어려운 애플리케이션을 활용해 연락을 주고받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한씨는 이전까지 모시던 이 전 부사장이 지난해 11월 14일 도주하면서 “김봉현 회장을 모셔라”라는 지시를 해 김씨 수행비서로 일했는데, 25억원어치의 수표를 환전하는 일까지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와츠앱’으로 지시를 받았다. 전화 통화를 할 때는 텔레그램을 사용했다. 스타모빌리티 관계자는 “김씨는 도주 후에도 최근까지 와츠앱을 통해 회사 직원들에게 자신의 범죄 사실을 숨기도록 지시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검찰 초동 대응 실패" 지적도  

라임 사태를 무마한 의혹을 받는 김모 전 청와대 행정관이 18일 오후 서울 양천구 서울남부지방법원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뉴스1

라임 사태를 무마한 의혹을 받는 김모 전 청와대 행정관이 18일 오후 서울 양천구 서울남부지방법원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뉴스1

검찰은 최근 김씨의 최측근인 김모 전 스타모빌리티 사내이사를 구속하고, 이 전 부사장 함께 일했던 김모 전 라임 대체투자운용본부장을 구속 기소했다. 또 라임 사태 무마 의혹을 받는 청와대 전 행정관 김모씨도 구속해 조사 중이다. 이 전 부사장·김씨와 직접적으로 연락하던 주요 인물들을 통해 범죄 사실 파악 및 소재지 추적에 주력한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법조계 안팎에서는 검찰의 ‘초동 대처’가 부실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운전기사 한씨는 이 전 부사장이 도주한 직후인 지난해 11월 중순부터 그달 말까지 두 차례 검찰에 참고인 조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 부사장의 소재지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때 이미 한씨는 이 전 부사장의 지시대로 김씨의 수행비서로 일하고 있던 때였다. 검찰이 조금 빨랐다면 본격적으로 김씨가 도주 계획을 세우기 전에 신병 확보에 나섰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검찰의 수사망이 한씨를 통해 자신을 향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김씨는 대담하게 지난 3월까지도 한씨에게 돈 세탁과 같은 업무를 시켰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운전기사를 구속할 게 아니라 이들을 활용해 김씨와 이 전 부사장 소재 파악에 나섰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한씨 변호인 "검찰 '보여주기식 수사' 지나쳐"  

운전기사 한씨의 변호인은 ‘검찰의 구속 기소는 부당하다’며 이번 주 내로 법원에 보석 신청을 할 예정이다. 변호인은 “한씨는 월급을 주는 윗선의 지시대로 한 것 밖에 없으며, 이 전 부사장과 김씨가 도주 중이라는 사실도 언론을 통해 알았다”며 “검찰의 소환 조사에 모두 응하고, 알고 있는 것을 다 이야기했는데도 범인은닉죄를 들어 갑자기 체포하고 구속까지 시킨 것은 지나치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검찰이 주요 피의자를 붙잡지 못하니까 괜히 한씨와 같은 운전기사들마저도 무리하게 구속해 '보여주기'하는 것 같다”고 비판했다.

이후연 기자 lee.hoo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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