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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이 낙태한 의사, 누군 무죄 누군 유죄···'22주'로 갈렸다

중앙일보

입력

[연합뉴스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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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주 된 배 속의 아기가 태어나길 기다린 세상은 4L짜리 물이 든 양동이였다. 지난해 3월 의사 A씨는 낙태 수술 뒤 산 채 태어난 아이를 양동이에 넣어 숨지게 했다. 당시 낙태 수술을 했던 조무사는 “아이가 움직이고 우는 소리를 들었다”고 말했고, 또 다른 조무사 역시 “아이가 꿈틀거리는 모습을 봤다”고 진술했다.

A씨는 살인과 업무상촉탁낙태(산모 등의 부탁을 받아 낙태한 의사를 처벌하는 것)죄 등으로 기소됐다. 헌법재판소가 지난해 4월 11일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이후다. 이 결정 뒤 1년이 흐른 올해 4월 10일 서울중앙지법 형사25-1부(재판장 김선희·주심 임정엽)는 A씨의 살인과 낙태죄를 모두 유죄로 인정해 징역 3년 6월을 선고했다.

그런데 이 판결이 있기 3일 전, 같은 법원 형사11단독은 낙태죄로 기소된 또 다른 의사 B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다. B씨는 낙태죄에 대한 헌재 결정보다 1년이나 앞선 2018년 4월 기소됐다. B씨가 1심 판결을 받기까지는 2년이 걸렸다. 그 사이 낙태죄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이 나왔고 B씨는 무죄를 받은 것이다.

낙태 두고 법원마다 다른 결과, 왜  

똑같은 낙태 수술에 대해 한 의사는 유죄, 다른 의사는 무죄를 받게 된 이유는 뭘까. 공교롭게도 유·무죄로 결과가 엇갈린 두 재판부는 각각 판결 근거로 헌재 결정을 들었다.

B씨의 낙태 무죄 판결문은 헌재 헌법불합치 결정에 대한 대법원 판례를 무죄의 근거로 봤다.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은 법률 조항에 대한 위헌이고, 헌재가 주문에서 입법 시한을 두고 그다음 날부터 법의 효력을 잃도록 했어도 위헌이라는 점은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다”는 판례다. 법원은 이 판례에 따라 B씨에게 적용된 낙태죄는 소급해서 효력을 잃어야 한다고 판결했다.

A씨에게 유죄를 선고한 재판부는 이를 조금 다르게 해석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 “헌재 결정 취지를 고려하면 A 씨를 처벌할 수 있다”고 썼다. 처벌에 대한 새 논의가 필요한 낙태는 헌재가 제시한 ‘임신 22주 내외’에 해당하는 낙태이지, A 씨처럼 34주 된 태아를 낙태하는 것까지 헌재가 전면 허용하라고 한 건 아니라는 시각이다. 아직 헌재가 제시한 입법시한이 남았다는 점도 짚었다.

헌재 결정 1년, ‘낙태죄’는 무죄일까 유죄일까

서울중앙지법 관계자는 “대법원 판례 해석을 두 재판부가 다르게 한 것 같다”며 “상급심의 판단을 받아 봐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대법원 판례 중 이 사건과 딱 맞는 판례는 아직 없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대법원의 한 판사는 “지금까지는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헌재가 제시한 입법시한이 도래되지 않았고, 법 개정도 이뤄지지 않은 사례에 대한 판례는 없어서 하급심에서 다른 결과를 낼 수 있다”고 말했다.

임지봉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무죄 판결도, 유죄 판결도 논리적으로 일리는 있다”며 “유죄 판결을 한 재판부는 임신 22주까지는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우선 고려해야 한다는 헌재 결정의 취지를 꼼꼼히 보고, 헌재 취지대로 입법이 된다면 A씨는 처벌 대상이 된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말했다. 임 교수는 "헌재 결정은 주문만 효력을 갖고 이유는 그렇지 않지만, 이 결정대로 입법이 된다면 차후에라도 A씨가 재심을 청구하는 등의 문제가 없을 것으로 재판부는 본 것"이라고 말했다.

엇갈린 판결, 남은 시한은 8개월

지난해 서울 마포구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열린 헌재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입장문 발표 간담회에서 나영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공동집행위원장이 입장문을 읽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서울 마포구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열린 헌재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입장문 발표 간담회에서 나영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공동집행위원장이 입장문을 읽고 있다. [연합뉴스]

대검찰청에 따르면 헌재 결정 이후인 지난해 5월부터 올해 3월까지 업무상촉탁낙태죄(교사·방조·치사 등 연관 죄명 모두 포함)로 기소된 사례는 3건, 기소 유예를 받은 사례는 4건이다. 자기 낙태죄로 기소된 사례는 없었다. 그런데 헌재가 제시한 시한인 올해 12월 31일까지 낙태죄에 대한 입법이 이뤄지지 않았을 경우에는 달라진다. 이 경우 헌재 결정에 따라 자기 낙태죄와 의사 낙태죄는 즉시 효력을 잃게 된다. 유죄 판결을 받은 A씨는 입법 시한이 만료될 때까지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지 않는다면 무죄가 될 가능성이 있다. 입법 시한까지 낙태와 관련한 보건 의료 정책이나 환경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결국 낙태가 수술이 필요한 여성 개인에게 각자 맡겨지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 헌재가 제시한 입법 시한은 8개월가량 남아 있다.

이수정 기자 lee.sujeo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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