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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과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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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장강명 소설가

장강명 소설가

마트에서 장을 볼 때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믿음이 바닥에서부터 흔들린다. 두 제도는 모두 우리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라고 가정한다. 어떤 정책이나 지도자가 가장 훌륭한지 유권자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으니 ‘국민에 의한 정치’를 하라고 한다. 생산은 생산자에게, 소비는 소비자에게 맡기면 그들이 자신들에게 가장 유리한 선택을 합리적으로 내릴 거라고 한다.

쇼핑보다도 못해진 정치 행위 #과연 우리는 합리적 존재일까 #이성 통하는 사회제도 꿈꾼다

그런데 과연 실제로 그런가 말이다. 정말 그렇다면 ‘반값 할인’이라는 말에 혹해서 필요 없는 떨이 상품들을 그렇게 많이 장바구니에 담지 않을 텐데. 마트 입구에서는 ‘꼭 필요한 물건만 사자’고 다짐하지만 20% 할인이라는 문구를 보면 마음이 흔들린다. 40% 할인이라고 적혀 있으면 그 상품이 필수품처럼 보인다.

정말 바보 같지만 장을 보는 순간 배가 고프면 간식거리들을 많이 주워 담게 된다. 당장 먹을 것도 아닌데 그렇다. 튀김 코너에는 작은 액정 화면이 있는데 거기서 자글자글 기름 끓는 음향과 함께 노릇노릇 먹음직스럽게 튀겨지는 새우나 닭다리 동영상이 나온다. 참 나, 이런 뻔한 노림수에 누가 넘어가겠냐 싶은데 바로 내가 넘어간다.

내가 합리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나보다 유통업체들이 더 잘 안다. 나를 낚으려고 그들은 연구를 거듭한다. 내가 평소 호감을 품은 연예인들을 광고 모델로 쓴다. 1만 원짜리 상품은 9900원이라고 적는다. ‘아, 이것도 필요했었지’ 하는 생각이 들게 상품을 배치한다. 그중에서 자신들에게 가장 이윤이 남는 물건을 내 시선이 주로 머무는 진열대에 배치한다. 그들은 그렇게 철저하게 전략을 짜고, 나는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다.

기업들이 브랜드와 마케팅에 들이는 어마어마한 비용을 떠올려보면, 그게 다 나를 낚기 위한 투자임을 생각해보면, 등이 서늘해진다. 그래도 내가 최소한 사기를 당하지는 않게 막아주는 사회적 장치들이 있다. 과장 광고를 하는 업체들을 공정거래위원회가 적발한다. 먹거리에 어떤 색소가 얼마나 들어가는지 식품의약품안전처가 감시한다. 엉겁결에 산 물건을 반품이나 환불하려 할 때는 한국소비자원이 나를 도와준다.

무엇보다 마트 스스로가 주의한다. 퍽퍽하고 맛없는 과일을 비싸게 내놓으면 내가 앞으로 그곳에서 농산물을 사지 않을 것임을 마트 운영자들은 안다. 나도 그들이 불량식품을 팔지는 않을 거라고, 유통기한을 바꾸는 저열한 속임수를 쓰지는 않을 거라고, 소비자원까지 찾아가지 않아도 상식적인 선에서 환불 요구를 받아줄 거라고 믿는다.

정치적 선택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적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렇지 못하다. 마트에 있을 때보다 기표소에 있을 때 내가 더 합리적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정당들이 소비재 기업보다 더 양심적이라고 믿을 이유도 전혀 없다. 가짜 뉴스와 유사 언론인들의 선동에 비하면 기업 광고 문구는 점잖다고 해줘야 할 판이다. 선거 때마다 신생 정당들이 생겨나고 온갖 기형적 꼼수가 등장하는 꼴을 보면 마트를 비교 대상으로 삼는 게 미안해진다.

많은 이들이 우리 시대의 정치 행위가 점점 더 쇼핑을 닮아간다고 걱정한다. 정치 영역을 기업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요구한다, 그러니 너희가 내놓으라 하는 식이다. 요구를 들어줄 때까지 정치 영역을 압박하고, 요구를 거부하면 불매 운동에 들어간다. 모든 시민이 곧 정치인이어야 하고 시민과 정치인 모두 현실에 대한 이해·숙고·토론·협상·반성 같은 자질을 갖춰야 한다는 주장은 순진하다 못해 낯설게 들린다.

그런데 나는 이제 차라리 정치가 쇼핑이라도 닮기를 바란다. 쇼핑을 할 때에는 적어도 내 지갑에서 돈이 나간다는 인식이라도 있다. 아무리 광고 문구가 번드르르하고 포장이 그럴싸해도 진열대 앞에서 우리는 내용물을 의심하고 고민하며, 결과에 책임을 진다. 지금 한국 유권자들이 그런가? 야바위꾼을 징계하고 불량 상품을 매대에서 걸러내는 장치도 마트 쪽이 훨씬 더 충실하게 갖춘 것 같다. 특히 이번 총선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이 굳어졌다.

원내 1, 2당은 비례대표를 내지 않았고 생긴 지 석 달도 되지 않은 위성정당들에 어중이떠중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자들이 모였다. 총선 뒤에 해산하겠다고 당규에 적은 당도 있다. 정책 공약? 시골 약장수도 이거보다는 성의 있게 근거를 댄다. 사람도, 정책도 온통 깜깜하니 충동구매를 피할 방법이 없다. 반품도 거의 불가능하다. 정치의 추락을 막을 사회적 장치들을 마련해야 할 텐데, 그 길 또한 정치다.

장강명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