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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피운 남편보다 더 미운 공범? ‘부부의 세계’ 속 분노유발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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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부부의 세계’에서 부와 명예를 가진 전문의 지선우 역할을 맡은 김희애. [사진 JTBC]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서 부와 명예를 가진 전문의 지선우 역할을 맡은 김희애. [사진 JTBC]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JTBC 금토드라마 ‘부부의 세계’(주현 극본, 모완일 연출)를 보고 있노라면 드는 생각이다. 가정의학과 전문의이자 병원 부원장으로서 부족한 것 하나 없던 지선우(김희애)의 입장에서 보면, 바람을 피운 남편 이태오(박해준) 못지않게 그 사실을 알고도 눈감아준 친구들, 아니 공범들이 미울 테니 말이다. 열일곱에 교통사고로 부모를 한꺼번에 잃고 홀로 남은 그가 남편을 따라 자리 잡게 된 가상의 도시 고산은 오랜 시간 ‘제2의 고향’처럼 푸근한 곳이었지만 순식간에 믿을 사람 하나 없는 ‘소리 없는 전쟁터’가 됐다.

한국식 막장 코드로 다시 태어난 영국 원작

여기에는 한국적인 각색도 한몫했다. ‘부부의 세계’는 영국 BBC 원작의 ‘닥터 포스터’와 큰 줄기는 같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다른 구석이 제법 많다. 평범한 중산층 부부는 모두의 선망을 한몸에 받는 상류층 스타 부부로 바뀌었다. 남편의 직업은 부동산 개발업자에서 영화감독으로 바뀌었고, 불륜 상대인 여다경(한소희) 역시 식당 딸에서 지역유지 회장 딸이 되어 필라테스 강사로 활동한다. 열정이 넘치고, 낭만이 흐르는 창작자와 뮤즈의 관계로 탈바꿈한 것이다. 모완일 PD는 전작 ‘미스티’(2018)에서도 선망받던 부부가 불륜에 대한 의심으로 무너져가는 모습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지선우는 남편 이태오(박해준)와 여다경(한소희)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된다. [사진 JTBC]

지선우는 남편 이태오(박해준)와 여다경(한소희)의 불륜 사실을 알게 된다. [사진 JTBC]

학연과 지연으로 얽힌 주변 인물들은 한층 고약해졌다. 이태오의 동창이자 지선우의 직장 동료인 설명숙(채국희)은 양쪽 눈치를 보는 캐릭터에서 태연하게 양쪽 간을 보는 ‘이중첩자’가 됐다. 역시 동창인 회계사 손제혁(김영민)과 전업주부인 고예림(박선영) 부부는 이중고를 안긴다. 지선우를 향한 손제혁의 추파는 한층 더 노골적이고, 남편의 바람기에 신물이 난 고예림은 겉으로는 언니를 위하는 듯하지만 속으로는 내심 안도한다. 각각 5부작으로 구성된 시즌 1(2015)과 시즌 2(2017)의 이야기가 16부작으로 리메이크 되는 과정에서 모두가 악역의 요소를 갖게 된 셈이다.

“너랑 사느라 내 아들도 고단했다”

남편의 외도 사실에 관해 시어머니(정재순)와 이야기하는 모습. [사진 JTBC]

남편의 외도 사실에 관해 시어머니(정재순)와 이야기하는 모습. [사진 JTBC]

그렇다면 이 중에서 최대 분노유발자는 누구일까. 김선영 TV평론가는“주택담보대출은 물론 아들의 보험금까지 손댄 이태오는 연민의 여지가 없는 인물”이라고 답했다. 김 평론가는 “원작과 비교하면 주인공이 주방에서 일하는 시간도 많고, 완벽한 아내이자 엄마, 며느리로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애쓰는 등 한국 결혼제도의 특성이 곳곳에서 드러난다”고 짚었다. 원작에서 남편의 외도를 경험한 시어머니가 “미안하다”며 며느리에게 용서를 구하는 반면, 한국판에서는 “바늘 끝 하나 안 들어가는 너랑 사느라 내 아들도 고단했다”고 외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같은 상처를 지닌 여성으로서 연대가 사라지면서 관계마다 갈등의 수위도 높아졌다”는 설명이다.

손제혁(김영민)의 시선은 항상 지선우를 향한다. 이를 지켜보는 아내 고예림(박선영). [사진 JTBC]

손제혁(김영민)의 시선은 항상 지선우를 향한다. 이를 지켜보는 아내 고예림(박선영). [사진 JTBC]

다양한 인물들의 시선이 교차하면서 심리 스릴러로서 매력은 배가됐다. 공희정 드라마평론가는 “복수를 치밀하게 계획하고 이를 단계적으로 행하는 것을 보는 재미도 있지만, 곁에서 지켜보는 관점을 통해 무너져 내리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다른 불륜 드라마와 차별화를 꾀하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공 평론가는 “남들 앞에서는 금슬 좋은 쇼윈도 부부 행세를 하지만 남편 차에 위치추적기까지 달 만큼 불안해하는 고예림 캐릭터가 가장 얄미우면서도 가장 불쌍하다”며 “본인의 불행을 타인의 불행으로 덮으면서 위안으로 삼는 방식으로는 절대 행복해질 수 없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나의 불행은 남의 불행으로 덮는다”

지선우와 같은 병원에서 일하는 직장 동료이자 이태오의 동창인 설명숙(채국희). [사진 JTBC]

지선우와 같은 병원에서 일하는 직장 동료이자 이태오의 동창인 설명숙(채국희). [사진 JTBC]

충남대 국문과 윤석진 교수는 “주인공뿐만 아니라 모든 인물이 각자 서사를 가짐으로써 다양한 관계 속에서 감정의 밀고 당기기가 가능해졌다”고 분석했다. “머플러에 붙은 머리카락 한 올에서 모든 비극이 시작된 것처럼 작은 소품도 놓치지 않고 활용하는 연출 덕에 배우들의 연기가 더욱 돋보인다”는 것. 윤 교수는 “결국 공감을 사지 못하고 기능적으로 활용된 인물이 가장 미움을 받지 않겠느냐”고 봤다. 설명숙이 이중첩자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나 흥신소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민현서(심은우)-박인규(이학주) 커플의 전사가 드러나면 보다 풍성한 이야깃거리를 갖게 될 것이란 얘기다.

지선우의 도움을 받은 뒤 불륜을 입증할 증거를 찾는 것을 돕는 민현서(심은우). [사진 JTBC]

지선우의 도움을 받은 뒤 불륜을 입증할 증거를 찾는 것을 돕는 민현서(심은우). [사진 JTBC]

하지만 고상한 체하는 속물주의(스노비즘) 색채를 강화하면서 현재 한국 사회보다 훨씬 보수적으로 묘사됐다는 비판도 있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는 “주위 모든 사람이 이혼하면 모든 게 끝나는 것처럼 이야기하면서 현실보다 후진적이고 퇴행적인 사고방식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그는 “남편한테 성병이 옮은 회장 사모님(서이숙)부터 데이트 폭력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바텐더까지 모두 ‘이 남자는 나 없으면 안 된다’는 조강지처 콤플렉스에 빠져 가부장제를 내면화하고 있는 것 아니냐”며 “스스로 발목을 잡는 자가당착에서 벗어난 진취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기법이 미려해졌을 뿐 진흙탕에 빠진 다른 불륜 드라마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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