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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본은 보건복지부의 인사 적체 해소처가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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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양수 서울아산병원 감염내과 교수 전 대한감염학회 이사장

김양수 서울아산병원 감염내과 교수 전 대한감염학회 이사장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이 심각한 수준이다. 대구·경북이 특수 상황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국내의 진정 국면은 착시일 가능성이 높다. 인구 밀집 지역인 수도권의 산발적 집단 감염과 해외에서의 유입이 큰 걱정거리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어서 장기전을 준비해야 한다. 해외 호평을 받은 대규모 진단 검사와 동선 공개는 매뉴얼에 따른 것인데, 호평에 취해 있으면 더 큰 위기를 맞을 수 있고 매뉴얼만으로는 더는 통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이제 시작”이라는 각오로, 전문성에 기반을 둔 방역 전략을 신속히 세워야 한다.

복지부 관료들 질본 센터장 맡으며 #선제적 현장 대응에 한계 드러내

코로나19가 다시 악화하기 전에, 국가방역시스템의 중추인 질병관리본부의 취약점을 시급히 개선해야 한다. 질본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역학 조사와 동선 공개밖에 없다는 말이 들린다.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싶어도 권한과 전문 인력이 부족한 것이 질본의 취약점이다. 국민은 언론 브리핑하는 본부장을 보면서 안도할지 모르지만, 브리핑은 본부장 밑에 있는 센터장 선에서 할 일이다.

본부장이 할 일은 정보를 분석하고, 전문가를 만나고, 방역 전략을 업데이트하는 것이다. 질본의 긴급상황센터장과 감염병관리센터장은 감염병 유행 시 현장에서 기민하게 움직여야 하는 중요한 직책인데, 잘 보이지 않는다. 전문가가 아닌 보건복지부 관료가 맡고 있다. 보건복지부 인사 적체를 해소하는 곳으로 질본을 이용한다고 한다. 브리핑하기 역부족이고, 전문가와 대화하기 힘들다고 한다. 질본이 유기적으로 작동하지 않고, 본부장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형국이다. 적절한 인사가 필요하며, 전문 인력 강화를 위한 제도적 장치도 마련돼야 한다. 오랫동안 공석이던 국립보건연구원장이 임명되고 질본 부본부장을 겸임하게 됐다. 전문성을 강화하고 본부장을 보좌하게 한 점은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연구원장은 본연의 임무인 코로나19 백신·치료제 개발을 위한 연구 전략 수립에 더 집중해야 한다. 지금은 연구 계획이 부실하다.

중앙사고수습본부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가 만들어졌지만, 장관과 총리는 전문가가 아니다. 역할이 겹치고, 윗선에서 결정해 발표하니 엇박자가 난다. 대통령은 비전문가인 장관을 거치지 않고 본부장을 직접 만나 가감 없는 생생한 의견을 들어야 한다. 미국에서는 국립알레르기·감염병연구소 소장이 수시로 대통령을 만나 조언하는 모습이 TV에도 나온다. 질본이 컨트롤타워임을 강조하고 권한을 확대해 주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생각된다. 질본의 전문성이 향상되고 컨트롤타워로서의 권한이 강화되면 방역 전략 수립에 필요한 어려운 일들을 해낼 수 있다.

가장 급한 일은 전국적 지역사회 유행 정도를 파악하는 것이다. 표본의료기관 200곳이 참여하는 인플루엔자 감시망은 유사 환자를 체크하여 유행 변화를 감지한다. 코로나19를 감시망에 포함하려는 질본의 계획은 의료계 협조를 얻지 못해 무산됐다. 의료계와의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 방치되고 있는 방대한 진단 검사 결과와 역학조사 자료를 분석하여 학계와 공유하고 협조를 받아야 한다. 무너진 전문학회와의 관계를 재설정해야 한다. 국민에게 코로나19의 미래, 백신·치료제의 상황을 정확히 알려주어야 한다. 교육 당국과 경제부처 등 국가 여러 분야에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여 불확실성 속에서의 의사결정을 도와야 한다.

전문성에 기반을 둔 방역 전략을 수립하고 국가방역시스템을 강화하여 대응하면 코로나19가 종식된 이후에도 성공한 방역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외국과 달리 차분하게 대응하는 위대한 국민에게 대통령이 직접 현재 상황과 방역 대책에 대해 담화를 발표하고, 교육·경제 등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야의 대책을 설명해 준다면, 아프고 지친 국민에게 큰 위로가 될 것이다.

김양수 서울아산병원 감염내과 교수·전 대한감염학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