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통령 미 의회서 왜 영어연설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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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오는 18일 미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노태우 대통령이 영어로 연설할 것이라는데 대해 시비가 일고 있다. 노 대통령의 이번 연설은 미국독립 후 2백년동안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외국원수들의 연설 횟수가 불과 68회밖에 되지 않고 우리로서는 54년 이승만 대통령이후 두 번 째라는 점에서 귀중한 기회임에 틀림없다.
때문에 우리 정부로서는 영광인 동시에 이 같은 기회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 연설내용과 방식을 놓고 무척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우리말로 할 것이냐, 영어로 할 것이냐의 결정이 문제였다. 정부는 처음 일단 우리말로 연설한다는 방침을 정했었다. 우리 국민을 대표하는 대통령이 세계 최강국의 의회에서 우리말로 하는 것이 우리 국민의 자존심을 만족시켜 줄 것이라는 관점에서였다.
또 한국인이 영어를 아무리 잘 구사한들 미 의원들과 미국인들에게 감명을 주기는 힘들 것이 아니냐는 지적과 함께 국가원수간의 공식 외교행위는 자국어로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가 제기됐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청와대·외무부관계자들간에는 『국민적 자존심과 반미 감정 등을 고려, 우리말로 하자』는 주장보다 『미 의원들에게 우리의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영어로 해야한다』는 주장이 더 우세하기 시작했다.
결국 동시통역 시설이 없는 미 의회에서 우리말로 연설한다면 우리국민의 자존심은 만족시킬지 모르지만 연설 상대인 미국 의회와 미국인들을 설득시키는 데는 미흡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특히 미국인들에게 별로 설지 않은 스페인어로 연설한 멕시코 대통령의 경우도 이석이 많고 분위기가 산만했다는 녹화필름이 뒷받침됐다.
이 같은 결론을 내리는 데는 주한 외교사절·학자 등의 자문이 있었고 나름대로 여론동향도 참고됐다. 지식층은 대체로 영어연설에 긍정적이었던 데 비해 방송국 등 대중을 의식하는 쪽에서는 반대의견을 편 것으로 알려졌다.

<찬성>
▲길승흠 교수(서울대·정치학)=대통령의 미 의회 연설은 한미 현안과 앞으로의 한미관계 정립 등에 대한 우리입장을 미 의원들과 미국 국민들에게 정확하고 감명 깊게 전달하는데 있다. 따라서 최근 우리의 반미 감정에 대응해 미국 내에서 일고있는 반한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통상마찰 등의 문제에서 실리를 얻기 위해 영어로 연설하는 것이 무리가 없다고 본다.
우리대통령이 미 의회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TV생방송으로 중계되는 가운데 우리의 입장을 생생하게 미국 국민들에게 전달해 줄 수 있는 기회를 살려야한다.

<반대>
▲김진균 교수(서울대·사회학)=미 의회에서의 대통령 연설은 사적인 친선을 도모하는 자리가 아니라 정식 외교행위가 이뤄지는 국가 간의 행사다.
우리 대통령이 미국에서 우리말로 외교행위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국제관례이며 양국이 서로를 존중한다는 의미에서도 합당한 것이다.
미 의원이나 미국인의 편의를 위해 다른 사람도 아닌 우리국민을 대표하는 대통령이 영어를 사용하겠다는 발상은 우리문화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있지 못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김두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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