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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 세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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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한애란
한애란 기자 중앙일보 앤츠랩 팀장
한애란 금융팀장

한애란 금융팀장

“10년 된 영어교재인데 요즘 들어 좀더 쉽게 만들어달라는 고교 영어교사들의 요청이 이어지고 있어. 학생들이 너무 어려워한대.”

영어 독해 교재를 만드는 출판사에 다니는 A가 모임에서 이야기했다. 다들 귀를 쫑긋 세웠다. 예전보다 고등학생 영어실력이 높아지면 높아졌지 떨어지진 않았을텐데, 왜?

A가 의외의 답을 내놨다. “영어실력 문제가 아니었어. 긴 지문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떨어진 거야. 그게 영어이든, 한국어이든.”

고교 국어교사 B가 전혀 놀랍지 않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국어시험을 보면 지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애들이 수두룩해. 심지어 지문이 아니라 문제를 이해 못해서 틀려. ‘가장 거리가 먼 것’을 고르라고 했는데, 도대체 가장 거리가 먼 것이 무슨 뜻인지를 모르겠다는 거야.”

C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요즘 애들이 그렇게 읽기를 못한다면, 왜 유튜브에는 온통 자막을 달아놓는 거지? 맞춤법 엉망인 자막, 읽기도 괴로워.”

다시 B가 나선다. “텍스트 세대니까. 어려서부터 카카오톡으로 소통해온.”

긴 글은 읽을 수 없고 추상적 표현은 이해 못하는 새로운 텍스트 세대의 탄생. 굳이 ‘명징’과 ‘직조’ 같은 한자어를 예로 들지 않아도 읽기 능력 퇴화 현상은 곳곳에서 감지된다. 얼마 전 추미애 법무부장관이 상갓집 항의 사태와 관련해 “장삼이사도 하지 않을 부적절한 언행”이라는 입장문을 내놓자, 포털 실시간 검색어에 ‘장삼이사’가 올랐다. 장삼이사(張三李四)가 무슨 말인지 몰라 찾아본 네티즌이 많았다는 뜻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 여느 때처럼 모바일 뉴스에 빠져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손바닥만한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 시선을 고정한 승객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문득 이것은 단지 세대의 문제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나는 다르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미국 인지신경학자 매리언 울프는 저서 『다시, 책으로』에서 놀라운 연구결과를 소개했다. “길고 난해한 문장을 받아들일 수 있는 ‘깊이 읽기 회로’는 지속되지 않는다. 상당한 지적 수준의 독자라고 해도 책에 몰입하는 경험을 잃으면 ‘초보자 수준의 읽는 뇌’로 회귀한다.”

몰입하는 독서의 경험, 당신은 얼마나 하고 있나.

한애란 금융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