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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취한 술꾼 깨운 그윽한 향…내 위스키로드의 시작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김대영의 위스키 읽어주는 남자(53)

스무 살은 소주로 시작했다. 20대 내내 소주를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외국에서 오래 살다 온 친구와 바(bar)에 갔다. 이미 소주로 잔뜩 취한 상태. 어두운 조명 아래 잔잔한 재즈 음악이 흐르는 곳이었다. 친구는 익숙한 듯 위스키 두 잔을 주문했고, 튤립처럼 생긴 잔이 내 앞에 놓였다. 조심스레 한 모금을 마셨는데, 술을 마신다기보단 맛이 좋은 음식을 먹는 느낌이 들었다. 소주보다 훨씬 도수가 높은데도 불구하고, 마실수록 술이 깨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어느새 위스키가 내뿜는 향과 맛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한 잔의 위스키. [사진 김대영]

아름다운 한 잔의 위스키. [사진 김대영]

위스키의 시작, 바텐더를 믿어라
그 후로 처음 위스키를 접한 그 바를 한동안 다녔다. 마치 첫 임무를 받은 게임 속 캐릭터처럼, 경험치를 쌓는다는 기분으로 위스키를 마셨다. 성장에 도움을 주는 조력자는 바텐더였다. 풍부한 위스키 경험을 가진 바텐더는 차근차근 위스키를 알려줬다. 같은 지역에서 생산되는 위스키를 소개해주거나, 비슷한 맛을 가진 위스키를 알려줬다. 또, 특정한 맛이 맘에 든다고 하면, 그 맛이 나는 다른 위스키도 추천해줬다.

바는 한 군데가 아니어도 좋다. 여러 바를 다니는 편이 더 좋다. 바마다 갖추고 있는 위스키도 다르고, 분위기나 서비스도 다르기 때문이다. 같은 위스키라도 다른 바에서 마시면, 그 맛이 전혀 다를 수 있다. 위스키는 잔의 형태나 병 오픈 시기에 따라 맛이 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골 바 하나를 정해두고 다녀도 좋다. 바텐더와 친해지면, 수년 전에 발매되어 지금은 맛보기 힘든 희귀 보틀을 맛볼 수도 있다. 내가 만나본 바텐더들은 아무리 귀해진 술이라도 술을 아끼는 법이 없었다.

 같은 위스키라도 다른 바에서 마시면, 그 맛이 전혀 다를 수 있다.

같은 위스키라도 다른 바에서 마시면, 그 맛이 전혀 다를 수 있다.

온전히 한 병의 위스키를 마셔보자
바를 다니면서 위스키 취향을 찾았다면, 이제 위스키 한 병을 온전히 마셔보자. 하룻밤에 한 병을 모두 마시라는 말이 아니다. 한 달이든, 일 년이든 시간은 얼마를 들여도 좋다. 700ml 한 병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모두 마셔보는 거다. 위스키는 공기와 접촉해 산화된다. 어떤 맛은 도드라지고, 어떤 맛은 사라진다. 한 병의 위스키가 변해가는 과정을 즐기면서, 그 위스키 맛을 보다 분명히 기억할 수 있다. 또 처음 오픈했을 땐 영 맘에 들지 않던 위스키가 1년 후엔 인생 위스키로 등극하는 경우도 있다. 물을 섞거나 얼음을 띄워서 마셔보는 것도 좋다.

집에서 만들어 마신 위스키 하이볼.

집에서 만들어 마신 위스키 하이볼.


이론부터 실습까지, 공부에 빠져든다
위스키에 푹 빠지다 보면, 어느새 공부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싱글몰트와 블렌디드 위스키가 어떻게 구분되는지, 세계 5대 위스키는 각각 어떤 특징을 갖는지, 싱글캐스크와 캐스크스트렝스 등 위스키 라벨에 쓰여 있는 용어가 뭔지… 위스키는 스카치위스키를 중심으로 꽤 체계적으로 정리가 되어있어서 공부하는 재미가 있다. “이건 스코틀랜드 아일라 섬의 한 증류소에서 만든 위스키인데, 이 섬에서 만드는 위스키들은 스모키한 특징이 있고, 그건 피트를…”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술에 취해서도 이 정도 지식을 뽐낼 수 있다.

이론 공부가 끝났다면 다음은 실습이다. 위스키를 만드는 곳에 가보자. 대부분의 위스키 증류소는 방문자 센터와 투어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위스키 증류소를 직접 찾아가, 몰팅, 매싱, 발효, 증류, 숙성, 병입으로 이어지는 위스키 생산현장을 둘러보자. 위스키에 대한 이해가 한층 깊어진다. 증류소에선 일반에겐 판매하지 않는 한정판 위스키도 살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미국, 캐나다, 일본 등 5대 위스키 생산국이 아니라도 좋다. 웬만한 유럽 국가엔 위스키 증류소가 있고, 인도와 대만에도 있다. 해외여행이 예정되어있다면, 그 나라에 위스키 증류소가 있는지 확인해보고, 당일치기로 다녀오면 좋다.

일본 하쿠슈 증류소 투어.

일본 하쿠슈 증류소 투어.

다양한 위스키 종류만큼, 다양한 위스키로드
여기까지가 소주로 시작해 위스키로 진행 중인 내 술 이야기다. 내 위스키 경험은 위스키 마시는 법에 정답이 없는 것처럼, 나의 길일 뿐이다. 당신의 위스키 경험은 어느 누구와도 다를 것이다. 셀 수 없이 많은 위스키 맛이 모두 다른 것처럼. 비싼 위스키를 마시는 누군가를 부러워할 필요도 없다. 앞에 놓인 한 잔의 위스키에 푹 빠져보자. 위스키의 호박색이, 부드러운 바닐라 향이, 달콤한 맥아 맛이, 유리잔의 매끄러운 촉감이, 잔 속의 찰랑거리는 소리가 당신의 오감을 일깨워줄 것이다.

중앙일보 일본비즈팀 과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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