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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혼학칙 폐지로 돌아온 이대생 3인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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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그들의 얼굴은 활기로 반짝였다. 원서를 옆구리에 끼고 강의실로 향하는 발걸음 또한 날아갈 듯 경쾌했다. 돌아온 만학도 정옥희(72.국어국문과).최은선(51.도예과).허순이(43.체육학과)씨. 이화여대의 금혼(禁婚)학칙이 폐지된 뒤 처음으로 재입학한 '여대생' 들이다.

정씨 등이 기자를 만난 것은 지난 달 30일. 캠퍼스를 다시 밟은 지 얼추 한달이 흘렀건만 그들은 재입학 당시의 기쁨.설렘.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30년 만에 다시 대학생이 됐다는 최씨가 "마치 2백억원짜리 로또복권에 당첨된 기분"이라고 말하자 허씨는 "재입학이 허용됐다는 통지를 받는 순간 가슴이 쿵쿵 뛰었다"며 동감임을 표현한다. 제법 큰 규모의 인테리어업체 사장인 허씨는 "21년 만에 모교로 돌아오니 공부 욕심에 강의실 제일 앞자리에 앉는다"며 열의를 감추지 않았다.

*** 가정형편 탓 일찍 결혼

재입학생 중 왕언니뻘인 정씨는 미국 남가주에 거주하다 49년 만에 졸업장을 받기 위해 서울로 날아온 유학생. 그는 "등록금과 비행기 값이 아깝지 않을 만큼 만학의 기쁨이 크다"고 말했다. 현재 학교 기숙사에 머물고 있는 정씨는 "손자녀같은 '동급생'과 나란히 앉아 공부하다보면 나도 20대가 된 것 같다"며 활짝 웃었다.

이들이 자랑스러운 졸업장을 포기해야 했던 데는 공통적으로 경제적 어려움과 딸의 애환이 숨어 있었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부산의 판자촌 캠퍼스에서 대학생이 됐던 정씨는 피란살이의 어려움 때문에 한학기를 쉬어야 했다. 아르바이트 등으로 어렵게 공부를 계속했지만 동기들과 함께 졸업장을 받을 수 없었다. 곧 이어진 결혼으로 그는 평생 이력서에 '이화여대 수료'라는 아픈 기억을 적어야 했다.

최씨와 허씨도 비슷한 경우다. 이들은 줄줄이 딸린 네명의 동생 때문에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해야 했고 결혼과 함께 공부의 꿈을 접어야 했다.

최씨는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고 물으면 '이화여대를 다녔다'고 얼버무릴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고 말했다. 허씨는 자신의 재입학 소식을 들은 친정 어머니가 "가슴에 박힌 못이 한순간 사라진 것 같다"고 말했다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 가족들 성원이 큰 힘

때문에 이들의 가족이 보내는 후원은 대단했다. 최씨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아닌 '은선이 대학보내기'에 조카들까지 나섰다"며 미국에 거주하는 조카가 보낸 영어로 된 예술서적을 자랑했다.

정씨는 "세딸은 물론 사위들까지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고 했다. 허씨는 "남편이 '젊은 여대생과 사는 기분이 꽤 좋다'고 은근히 좋아하며 밥상을 차려 줄 때도 있다"며 남편의 뒷바라지를 과시(?)했다.

하지만 20~50년 만에 다시 시작한 공부가 호락호락할 리는 만무했다. 희곡 쓰기와 읽기 등 세 과목을 수강하는 정씨는 "한국 드라마가 예문으로 자주 등장하는 바람에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고 토로했다. 처음엔 리포트의 내용을 잘못 이해해 엉뚱한 숙제를 하고선 얼굴이 빨개지기도 했다.

그러나 앞자리의 친절한 '동급생'이 수업 중에 수시로 돌아보며 '과외수업'을 해주는 덕에 요즘엔 곧잘 따라잡는다고. 정씨는 "공부가 어려울 때면 굳이 학점을 따지 말고 수강생으로 지낼까 하다가도 강의를 듣다 보면 꼭 A학점을 받아야지 하는 마음이 생긴다"며 의욕을 보였다.

최씨도 "리포트를 쓸 때마다 반드시 동급생에게 전화해 내용을 확인한다"며 "수업시간 외에도 혼자 작업실에서 연습한다"고 말했다.

*** 엉뚱한 리포트 쓰기도

'늦깎이 대학생'에게 얽힌 에피소드도 많다. 최씨는 "첫 수업시간에 학생들이 나를 교수로 오인하기도 하고 교수가 '은선이…'라고 출석을 불렀다가 뒤늦게 당황해 하기도 했다"며 웃었다. 그는 같은과 학생들이 "엄마와 동갑인 '언니'가 너무 멋있어요"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오고 학교 앞에서 함께 점심을 먹기도 한다며 젊음을 자랑했다.

"시간의 잔고는 누구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열심히 공부해 반드시 졸업장을 받을 겁니다."

세 사람의 활기찬 목소리에서 열정이 묻어났다.

문경란 여성전문기자<moonk21@joongang.co.kr>
사진=김춘식 기자 <cyjb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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