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벤처·스타트업계 창당 선언
판교발(發) 정치혁명이 가능할까. 난공불락인 한국의 규제환경에 지친 IT벤처·스타트업인들이 직접 정당을 만든다. 거미줄처럼 촘촘히 짜인 한국의 규제환경을 원내에서 직접 혁파하겠다는 게 목표다. 고영하(68) 한국엔젤투자협회 회장, 이금룡(69) 도전과나눔 이사장, 고경곤(57) 한국인터넷전문가협회장 등이 주축이다. 지난 16일 서울 강남 팁스타운에서 열린 얼리버드챌린지포럼에서 100여 명의 IT 벤처인들이 모인 가운데 이들은 가칭 ‘규제개혁 비례당’ 창당을 공식화했다.
[뉴스분석]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 김병관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등 IT 기업인들이 기존 정당을 통해 원내에 입성한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업계에서 직접 창당 움직임을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들은 왜 굳이 정당까지 만들려는 것일까.
① 도대체 왜?
무엇보다 기성 정치권에 규제개혁을 기대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고경곤 협회장은 “이명박·박근혜·문재인 대통령 모두 취임하고 제일 먼저 규제혁신을 얘기했지만 지난 20년 간 우리는 클라우드·빅데이터·드론·자율주행·블록체인·공유경제까지 모두 규제 때문에 실기했다”며 “거대 정당에 초선 의원으로 들어가봐야 높은 분들 앞에서 말도 제대로 하기 어려운 만큼 우리가 직접 당을 만들기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타다 사태' 영향이 컸다. 이재웅 쏘카 대표와 타다 운영사인 VCNC 박재욱 대표 등이 여객자동차법 위반으로 불구속 기소되고 ‘타다 금지법’으로 불리는 개정안이 나오자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한다. 이금룡 이사장은 “타다 사태를 보며 절망했다”며 “더 많은 사람들이 첨단 기술의 혜택을 누리게 되는 ‘기술의 민주화’를 정부가 막고 있는 상황을 방치할 수 없다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타다만 봐도 주 고객인 30대 여성이 길에서 아이 데리고 택시 타는 게 힘들다 보니 안전하고 쾌적한 타다를 선호해서 성장한 건데, 그걸 정부가 나서서 ‘너 타지마’라고 하는 게 말이 되냐”고 지적했다. “국민이 더 많은 혜택을 보려면 스타트업들이 성장해야 하는데 정부가 막고 있다”는 것이다.
② 기폭제는?
임계치까지 차오른 IT 업계의 불만을 수면 위로 밀어 올린 것은 선거법 개정이다. 오는 4월 15일 치러질 21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도입되는 ‘준연동형 비례대표제’는 군소정당의 원내 진입 가능성을 높였다. 전국 득표율 3%를 넘기면 비례대표 의원을 배출할 수 있다. 고영하 회장은 “새로운 기술로 뭔가를 하려 하면 전부 다 정부에 허가받아야 하는 상황이 말이 되냐”고 반문했다. 이어 “국회에서 교두보 1석만 확보하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 감시하고 주장할 수 있다"며 "기성 정치권이 자극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우리는 권력의지가 전혀 없고 정치 세력화할 생각도 전혀 없다”며 “오직 규제개혁이라는 주제 하나만 가지고 정당을 만드는 실험”이라고 덧붙였다.
③ 선거 준비는 어떻게?
가칭 ‘규제개혁 비례당’은 20일부터 창당 준비를 시작한다. 모든 활동은 모바일에서만 할 예정이다. 창당선언문이 마련되면 카카오톡과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발기인을 모집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후 3월 17일까지 전국 5개 도시에 총 5000명의 당원을 모집한 다음 정당 등록을 할 계획이다. 고경곤 협회장은 “현재 뜻을 같이하는 이들 대부분은 SNS 활동이나 모바일 앱 제작에 능한 사람들"이라며 모든 활동은 온라인으로 하고 비용을 최소화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기성 정당이 하는 오프라인 대규모 집회는 전혀 할 생각이 없다”고 덧붙였다.
선거운동도 돈을 안 쓰는 게 핵심이다. 비례대표가 될 후보자는 30~40대 IT 기업인 중에 찾을 생각이다. 고영하 회장은 “우리는 후배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후원하는 역할만 할 뿐”이라며 “3%의 지지를 얻어 원내 1석을 확보하는 게 우선적인 목표”라고 설명했다.
④ 현실 가능성은?
현재로선 이들의 성공 가능성을 가늠하기는 어렵다. 선거법 개정 이후, 비례대표 1석을 노리는 군소정당이 급증하고 있다. 다만, IT업계 출신인 이들은 IT, 모바일, 디지털의 폭발력을 강조했다. J 커브(J자 모양 급상승)를 그리는 스타트업의 성장 곡선처럼 출발은 미약하지만 규제개혁이라는 성과를 얻어낼 가능성도 있다는 얘기다. 이금룡 이사장은 “한번 불이 붙기 시작하면 의외의 파괴력을 보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박민제 기자 letme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