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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여의도 말고 서초동 가야 하나” 1150개 스타트업의 한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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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박민제 산업2팀 기자

박민제 산업2팀 기자

“여의도 찍고 서초동 가는 게 공식처럼 돼버렸다.” 최근 만난 판교밸리 한 정보기술(IT) 스타트업 관계자의 자조 섞인 한탄이다. 스타트업 입장에선 규제에 대한 효과적 해법을 찾는게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다. 그런데 요즘 그 문제 해결을 여의도 국회가 아닌 서초동 검찰과 법원에서 맡게 되는 일이 늘고 있다는 우려에서 나온 말이다.

데이터3법, 타다, 전동킥보드… #범법 고발돼 법 통과에 생사 걸려 #“국회만 목 빠지게 쳐다봤는데…” #기업들 ‘경제의 사법화’에 허탈감

문재인 대통령부터 나서서 “시급히 처리돼야” 한다고 수차례 강조했고 여야 원내대표도 처리하겠다고 한목소리로 외쳤던 ‘데이터 3법’(개인정보보호법, 신용정보법,정보통신망법)만 봐도 그렇다. 이중 개인정보보호법과 신용정보법은 지난달 29일 통과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법제사법위원회 단계에서 막혔다. 데이터3법은 개인을 특정하는 정보를 지운 ‘가명 정보’를 기업들이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법이다. 인공지능(AI), 클라우드, 사물인터넷(IoT) 등 4차산업 혁명 기술 고도화에 필수적이다.

IT기업들이 법안의 필요성을 주장하게 된 직접적 원인은 2017년 11월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가 24개 기업과 단체를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으로 고발한 건이다. 2016년 정부가 발표한 ‘개인정보 비식별 가이드라인’에 따라 해당 기업들이 비식별화된 개인정보 데이터를 사용해왔는데 이게 불법이라는 취지의 고발이었다. 1년 4개월 만인 지난 3월 검찰이 무혐의 처분을 내렸지만, 법제화가 안된다면 사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는 불씨가 남아있는 상황이다.

지난 10월말 서울 영등포구 주차장에 ‘타다 베이직’이 서 있다. [뉴시스]

지난 10월말 서울 영등포구 주차장에 ‘타다 베이직’이 서 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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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부터 재판이 시작되는 렌터카 기반 차량호출서비스 ‘타다’도 마찬가지다. 2013년 우버가 국내에 진출했을 때부터 준비했으면 소모적 갈등은 덜 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형사고발→처벌’로 이어지는 손쉬운 해결책을 택했다. 국회도 갈등을 줄이고 새로운 산업의 숨통을 틔워주는 법안 마련이라는 책임을 소홀히 했다.

결국 지난해 말 카카오모빌리티의 카풀 갈등, 올해 VCNC의 타다 갈등으로 불이 붙었고 이재웅 쏘카 대표 등 혁신을 추구한 기업가 2명은 형사사건 ‘피고인’ 신세가 돼 버렸다.

국회가 극한 대립에 빠지면서 모빌리티 서비스 등 신산업 성장에 필수적인 법안들이 좌초하고 있다. 지난달 1일 경기 화성시 청계중앙공원에서 열린 행사에 ‘고고씽’ 전동킥보드가 전시돼 있다. [뉴스1]

국회가 극한 대립에 빠지면서 모빌리티 서비스 등 신산업 성장에 필수적인 법안들이 좌초하고 있다. 지난달 1일 경기 화성시 청계중앙공원에서 열린 행사에 ‘고고씽’ 전동킥보드가 전시돼 있다. [뉴스1]

전동킥보드 공유플랫폼도 마찬가지다. 1만대 안팎의 전동킥보드가 현재 운행 중이지만 이용자 상당수는 범법자다. 현행 도로교통법상 원동기장치자전거로 분류되는 전동킥보드는 인도나 자전거도로를 다닐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려는 법안이 발의됐지만, 국회 상임위에서 논의가 멈춰버렸다.

개별 기업 입장에선 법안 통과 여부는 생사가 걸린 문제다. 하지만 자유한국당이 지난달 29일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신청하고, 더불어민주당이 같은 날 본 회의를 무산시키면서 정기국회 종료일(10일)까지 해당 법안의 통과 가능성은 더욱 낮아졌다.

“국회만 목 빠지게 쳐다봤지만 남은 건 허무함 뿐이네요.” 1150개 스타트업이 모여 만든 단체인 코리아스타트업포럼 정미나 정책팀장의 얘기다. 데이터3법 통과를 위해 지난 수년간 노력해온 김재환 인터넷기업협회 정책실장은 “이젠 성명서를 쓸 힘조차 사라졌다”고 말했다.

300명이나 되는 국회의원이 있는데 검찰과 법원이 미래 먹거리를 좌우할 기술과 산업의 명운을 결정하는 ‘경제의 사법화’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사법적 판단은 근본적으로 보수적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하루빨리 국회가 정상화돼 사법의 영역에서 정치의 영역, 경제의 영역으로 기업의 미래에 대한 결정권을 가져와야 한다. 이제 이를 위해 남은 시간은 9일이다.

박민제 산업2팀 기자 letm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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