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태도가 매우 부드러운 신사입니다. 이제부터 더 자주 만날 수 있는 관계를 만들 수 있다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지난달 말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말이다. 지난 해 12월 29일 방송된 ‘BS테레비도쿄’ 인터뷰였는데, 녹화는 방송 이틀 전에 했다. 녹화 당일 발언록을 구해 읽었더니 한국 관련 부분은 4분 정도였다.
15개월 만에 정식 정상회담이 열린 지 사흘 뒤였지만 그의 태도는 이전과 차이가 없었다. 징용 문제에 대해서도 “약속이 지켜지지 않으면 국가 간 관계는 성립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다 ‘문 대통령은 어떤 분입니까’라는 사회자의 질문에 못 이겨 짧게 덕담한 게 전부였다. 그런데도 한국에선 회담 이후 아베 총리의 태도가 크게 바뀐 것처럼 난리가 났다. “한국에선 이 발언이 왜 뉴스가 되느냐”는 일본인 지인의 지적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비슷한 사례는 정상회담이 열리기 열흘 전쯤에도 있었다. 지지통신 주최 강연회에서 나온 아베 총리의 발언이 발단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중국 청두(成都)의 일·중·한 정상회의에 출석하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리커창 총리와 회담, 문재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할 예정이다….” 60분의 강연 중 한국에 대한 언급은 이 한마디였다.
한국에선 “마땅히 한국과 동시에 해야 할 정상회담 일정 발표를 먼저 가로챘다” “‘한국과의 대화’를 외교 성과로 앞세워 각종 스캔들로 하락한 지지율을 만회하겠다는 의도”라고 부글댔다. 하지만 일본은 조용했다. 외교 성과를 국민들에게 알리려는 의도였다면 적어도 ‘절대적 우군’ 매체 몇 군데는 이를 크게 보도하는 게 맞다. 하지만 신문들 중 “크리스마스이브에 문 대통령을 만난다”는 말을 의미 있게 부각한 곳은 거의 없었다.
한·일관계에 큰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는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엔 식민지배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란 표현이 담겼다. 1993년 처음 당선된 ‘젊은 피 의원’ 아베 신조는 당시에도 “조약으로 끝난 문제를 문서로 또 사죄한다면 앞으로 한국 대통령이 새로 뽑힐 때마다 (사죄를) 반복해야 할 것”이라고 불만을 터뜨렸다. (미야기 다이조 『현대일본외교사』) 병아리 의원 때부터 ‘한·일 문제는 1965년 기본조약과 청구권협정으로 이미 정리됐다’는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이런 ‘확신범’ 수준의 상대와 맞서기 위해 필요한 건 냉정한 상황판단과 치밀한 협상전략이다. 빨리 끓어오르고, 빨리 식는 태도로는 상대방에게 약점만 잡힌다.
서승욱 도쿄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