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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2035

잘 털린 걸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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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문현경 기자 중앙일보 기자
문현경 금융팀 기자

문현경 금융팀 기자

“혹시라도 검찰 갈 일 생기면 절대 휴대폰 가져가지 마세요.” 얼마 전 한 변호사가 들려준 ‘검찰 조사 꿀팁’이다. “‘찔리는 것 없지 않으냐, 한번 보자’고 해 보여주는 순간 끝”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사건과 관련 없는 것엔 눈 감았다 관련 있는 것에만 눈뜨는 영험한 힘을 가진 조사관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 휴대폰을 쥐어주는 순간 그 속에 담긴 흠과 때와 먼지와 속살까지 모두 보여주는 셈이라고. 그래서 찔리는 것 없는 평범한 사람들도 털리고 간다고….

휴대폰은 성능 좋은 진공청소기처럼 그 주인의 모든 먼지를 빨아들여 보관하는 먼지통이다. 한 인물에 대한 정보 집약력으로 치면 인류 역사 이래 스마트폰을 뛰어넘는 게 없다. “뭐 이런 걸 적냐”고 하면 ‘뭐 이런 걸 적냐고 하셨다’까지 적었다는 사초(史草)보다 더하다. 위치정보, 금전 거래내용, 구매내용, 검색내용, 동영상 재생내용, 다운로드파일, 통화, 이메일, 문자, SNS까지 일부러 혹은 모르고 남긴 나의 흔적들은 다 그러모으면 가상의 나를 만들 지경이다. 음식점을 가도 스마트폰으로 검색·예약하고, 친구들과 만난 뒤엔 SNS로 사진을 받고 더치페이 금액을 보내는 세상에서 오프라인의 삶은 오히려 온라인 삶의 축소판이다. 바꿔말하면, 우리는 스마트폰 속 공간이 누구에게도 공개되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기에 오프라인에서보다 더 큰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는 셈이다. 스마트폰을 쓰면서 ‘앞으로 혹시 누가 이걸 보게 될까’ 생각해야 한다면, 그건 누가 볼까 솔직히 쓸 수 없던 어린 시절 일기장처럼 불편한 것이 되어버린다.

유명 연예인의 휴대폰이 해킹돼 6년 전 SNS 대화가 돌아다닌다고 한다. 먼지통이 열렸고 먼지는 흩뿌려져 주워 담을 수 없게 됐다. 먼지를 뒤집어쓴 사람들은 대화에 등장한 여성들을, 그의 가족들을 털러 다니지만 관심이 먼지의 더러움에만 집중되면 잊히는 것이 있다. ‘먼지통은 열려도 되는가’ 같은, 개인정보에 대한 원칙이다. 미란다 원칙의 그 미란다는 18세 소녀를 납치·강간한 흉악범이었다. 그의 이름을 딴 인권 원칙이 만들어지고 우리도 그걸 사용하고 있는 이유는 그가 저지른 범행이 잔인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미란다는 나쁜 놈이지만, 미란다 같은 나쁜 놈에게도 적용되어야만 그것이 원칙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나쁜 놈!’이 ‘나쁜 놈, 잘 털렸다’까지 이어진다면 우리의 폰도 쓰기 싫은 일기장이 되어버릴지 모른다.

문현경 금융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