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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의 퍼스펙티브

저금리의 역습…경제 못 살리고 부동산 거품만 생기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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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제로·마이너스 금리가 뉴 노멀인 시대

우리나라 평균 금리는 1990년대엔 무려 13.31%였다. 2000년대에 4.05%로 곤두박질했고 2010년 이후에는 2.11%로 바닥을 기고 있다. 저금리는 전 세계적 추세다. 선진 4개국(미국·유로존·일본·영국)의 기준금리도 1990년대 평균 4.95%에서 2000년대 2.61%, 2010년 이후 0.39%로 낮아졌다. 요즘은 제로금리도 흔하고 일본(-0.1%)·유로존(-0.5%)·스위스(-0.75%)는 아예 마이너스 금리다. 저금리가 뉴 노멀(New Normal)로 자리잡은 시대다.

저금리…소비·투자 위축의 역설 #신흥국에선 저축 늘고 부동산 버블 #한국은 GDP 대비 가계부채 임계치 #“부동산 계속 돈 몰리면 거품 붕괴”

하지만 저금리로 펼쳐지는 현실의 세상은 기존의 화폐금융 이론과 전혀 다르다. 금리 인하는 원론적으로 가계와 기업의 자금 조달 비용을 낮춰 소비와 투자를 촉진하고, 그 결과 성장률과 물가가 높아진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기준 금리를 아무리 내려도 소비와 투자는 부진하다. 경제성장률과 물가상승률도 계속 낮아지고 있다. 물론 반론이 가능하다. 만약 금리를 올렸다면 어땠을까. 소비와 투자는 더 곤두박질하고 저성장과 디플레이션이 훨씬 심화됐을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금리 인하의 효과가 예전만 같지 못하다는 점이다.

한화투자증권 김일구 수석이코노미스트의 분석에 따르면 2000년 이후 기준금리와 소비증가율의 상관관계는 기준금리가 높을 때(경기가 좋을 때) 오히려 소비증가율이 높고, 금리가 낮을 때 소비증가율이 낮았다. 소비성향 역시 놀랍게도, 기준금리 인하 이후 0.92에서 0.86으로 낮아졌다. 김 수석은 “금리 인하에 따른 소비 부양 효과는 일부 선진국에서만 나타났을 뿐, 일본과 신흥국에선 오히려 소비를 줄이고 저축을 더 늘리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했다. 신흥국들은 복지망이 허술해 저금리로 노후가 불안해지자 오히려 저축을 늘렸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 9월 말 국내의 정기예금 잔액도 전년 동기 대비 10.6%나 증가한 750조원에 달했다. 〈그림 1 참조〉

퍼스펙티브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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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현상은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R(경기침체)의 공포’가 확산하면서 전 세계 채권 가운데 30%가 마이너스(-) 금리였다. 하지만 소비나 투자 대신 저축만 늘어났다. 독일의 저축은 전년 대비 8.5% 늘어난 2339조원을 기록했다. 일본 은행들도 마이너스 금리에 예금만 늘어나자 이자는커녕 고객들에게 통장 인지세와 관리 비용 등을 받기 시작했다.

저금리는 저성장·저출산·고령화와 함께 수축사회를 상징한다. 상당 기간 이런 현상이 뒤바뀔 조짐은 없다. 미국의 경우 트럼프 대통령이 저금리를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그는 지난해 1월 주가가 일시적으로 하락하자 “금리를 안 내리는 미친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라 비난했고 9월에는 “멍청한 제롬 파월”이라며 FED 의장의 해임을 위협했다. 자신의 재선을 위해 어떻게든 금리를 낮춰 경기와 주가를 띄울 궁리만 하고 있다.

한국도 저금리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궁지에 몰렸다.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1965년 이후 최저인 0.4%로 떨어져 디플레이션을 걱정할 정도다. 지난해 성장률도 2% 달성이 불투명한 수준이다. 이에 따라 체감 지표인 경상성장률(실질성장률+GDP 디플레이터)은 꽁꽁 얼어붙었다. 정부는 소비·투자·수출입을 반영하는 GDP 디플레이터가 마이너스 0.8%로 곤두박질해 작년 경상성장률을 1.2%로 추산하고 있다. 이는 외환위기 때인 1998년(-0.9%) 이후 최저이며 미국(4.1% 추산)·일본(1.6%)보다 낮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꼴찌다. 금리 인하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됐다.

하지만 저금리의 부작용이 불거지면서 경제를 살리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될지 모른다는 경고가 꼬리를 문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저금리와 풍부한 유동성으로 인해 조금이라도 더 높은 수익률을 좇아 너무 많은 자금이 비우량채권과 부동산·주식 등 위험자산에 유입됐다”며 “저금리가 금융시장을 심각하게 위협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전 세계 IMF 주택가격 지수는 2000년 68에서 지난해 110으로 두 배 가까이 뛰어올랐다. 〈그림 2 참조〉 토비아스 아드리안 IMF 통화자본시장국장은 “세계 경제가 글로벌 금융위기 때의 절반 정도만 침체해도 부실채권(이자조차 갚을 수 없는 좀비기업의 채권)이 19조 달러에 이르러 충격이 증폭될 것”이라 경고했다. 실제로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글로벌 고위험·고수익 채권(신용등급 BB 이하) 발행 규모는 10년 만에 1조 달러에서 2조5000억 달러로 급팽창했다. 〈그림 3 참조〉

국내에도 저금리 속에 소비와 투자가 위축되는 흐름이 뚜렷하다. 최근엔 화폐 유통 속도도 역대 최저로 떨어졌다. 물가상승률을 감안한 실질 금리가 1%도 안 되는 상황에서 시중 부동자금만 1200조원 대로 부풀어 올랐다. 이런 소비와 투자 위축에 대해 전문가들은 “금리가 내려도 경제 불확실성이 더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저금리로 인해 부채가 팽창하고 부동산이 과열되는 부작용은 전 세계의 공통적 현상이다. 국제금융협회에 따르면 전 세계 기업과 정부의 부채는 2000년대 중반 각각 30조 달러에서 지난해 각각 70조 달러, 65조 달러로 늘어났다. 〈그림 4 참조〉 한국은 더 심각한 수준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GDP 대비 가계 부채 비율은 94.6%에 이르렀다. 그 증가율도 홍콩·중국에 이어 세계 3번째다. 국제결제은행(BIS)은 가계 부채가 GDP 대비 60~85%에 이르면 원리금을 갚느라 소비와 경제성장에 제약을 받게 된다고 경고한다. 한국은 그  임계치를 오래전에 넘어선 셈이다.

여기에다 부동자금이 몰리면서 서울 강남의 아파트 값 과열은 국가적 문제가 됐다. 18차례 부동산 대책이 나왔지만 저금리의 저주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 한국은행 이주열 총재는 올해 신년사에서 “부동산이나 위험자산으로의 자금 쏠림이 금융 불균형을 심화시킬 가능성에 유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금융연구원도 지난주 “낮은 금리가 계속될 경우 금융자산 수익률보다 주택 임대수익률이 높게 될 뿐 아니라 주택 구매를 위한 차입비용도 하락하게 돼 주택가격 상승과 가계부채 증가 리스크를 확대할 수 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들 경고를 쉬운 말로 번역하면 “저금리로 계속 부동산에 돈이 몰리면 가계 부채와 부동산 거품이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뜻이다.

스웨덴·캐나다의 역발상

요즘 국제 금융시장의 시선을 사로잡는 나라는 스웨덴과 캐나다. 금리 인하 대신 기준 금리 인상을 택했기 때문이다. 캐나다 중앙은행은 2017년 이후 5번이나 기준 금리를 올려 현재 1.75%. 2008년 이후 최고 수준이다. 캐나다의 초강수는 두 가지 이유에서다. 경제가 호조에 진입했다는 자신감, 그리고 역대 최고 수준의 가계 부채로 인한 부담감 때문이다.

캐나다가 기준 금리를 올리기 시작한 2017년에는 3%의 고도성장에다 중국의 막대한 핫 머니가 유입돼 부동산 시장이 과열됐다. 가계 소득 대비 부채 비율은 170%로 역대 최고 수준으로 치솟았다. 이후 기준 금리 인상으로 부동산 과열이 꺾이고 경제 성장률도 1.5%~1.7%로 안정을 되찾았다. 스티븐 폴로즈 중앙은행 총재는 “최근 주택시장의 약세와 국제 무역갈등을 눈여겨보며 향후 금리 방향을 정하겠다”고 밝혔다.

스웨덴은 유로존을 따라 한때 기준금리를 -0.5%까지 끌어내렸다. 하지만 2018년 0.25%포인트 인상한 데 이어 지난해 말 0%로 한 차례 더 올렸다. 4년 반 만에 마이너스 금리를 탈출한 것이다.

스웨덴의 응급처방은 마이너스 금리로 인한 부작용이 너무 심각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특히 가계부채와 주택 가격 거품이 문제였다. 지난해 봄 스웨덴의 GDP 대비 가계부채 비중은 87.8%로 세계 9위. 기업부채는 GDP 대비 162.9%로 세계 4위를 기록했다. 마이너스 금리에도 투자·소비 증가 효과는 크지 않고 주택 시장 과열과 은행 수익성 악화만 초래한 것이다.

두 나라 금리 인상의 공통점은 인플레나 호황 때문이 아니라 저금리의 부작용이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나라의 금리 인하 모델이 되기는 힘들다. 하지만 국제금융센터는 “2010년 이후의 무제한 양적 완화나 마이너스 금리 등 비전통적 통화정책에 대한 경계감이 확산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