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年9000만원 특혜설 휘말린 조선 '마지막 황손'···"대응 말라"

중앙일보

입력

조선 '마지막 황손' 이석(사진 가운데) 황실문화재단 이사장이 크리스마스 이브인 지난 24일 김승수(왼쪽) 전주시장 등과 함께 풍남동 저소득층 청소년을 찾아 후원금을 전달하고 있다. [사진 황실문화재단]

조선 '마지막 황손' 이석(사진 가운데) 황실문화재단 이사장이 크리스마스 이브인 지난 24일 김승수(왼쪽) 전주시장 등과 함께 풍남동 저소득층 청소년을 찾아 후원금을 전달하고 있다. [사진 황실문화재단]

"나에 대한 비판도 여론이다. 시간이 지나면 내 진심을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다."

전주시, 황실문화재단 年9000만원 지원 #'황손과 함께 하는 전통문화 체험' 명목 #"계급 사회냐" VS "콘텐트 강화" 엇갈려 #고종 손자 이석 이사장 "대응 말라" 지시 #크리스마스 이브에 성금 800만원 전달 #매년 사회복지시설 찾아 묵묵히 봉사

조선의 '마지막 황손' 이석(李錫·78) 황실문화재단 이사장이 최근 측근들에게 한 말이다. 전주시가 재단에 '황손과 함께 하는 전통문화 체험' 프로그램 등의 명목으로 연간 9000만원을 지원한다는 소식에 특혜 논란이 일자 이 이사장이 보인 반응이다.

이 이사장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義親王)의 12남 9녀 중 10남이다. 고종이 낳은 9남 4녀 중 성인으로 자란 자녀는 순종과 1907년 황태자에 책봉된 영친왕(英親王), 의친왕, 덕혜옹주(德惠翁主) 3남 1녀뿐이다. 고종의 고명딸이자 '마지막 황녀'였던 덕혜옹주가 이 이사장의 고모다.

이 이사장은 2004년부터 전북 전주 한옥마을에 있는 495㎡짜리 '민박형 한옥' 승광재(承光齋)에 머물고 있다. 김완주 전 전북지사가 전주시장일 때 '전주를 상징하는 존재가 있어야 전주 한옥마을이 관광지로 발돋움한다'고 부탁해 이 이사장이 승광재에 살게 됐다는 게 정설이다. 승광재는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 황제 시절의 연호인 광무(光武)에서 '광(光)'자를 따고, 잇는다는 의미의 '승(承)'자와 합쳐 '고종 황제의 뜻을 이어가는 집'이란 의미를 지닌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손이자 고종의 손자인 이석(가운데) 황실문화재단 이사장, 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의 손자인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비롯한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3·1절 100주년인 지난 3월 1일 서울 세종대로에서 열린 고종 장례행렬 재현 만세 행진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행진하고 있다. [뉴스1]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손이자 고종의 손자인 이석(가운데) 황실문화재단 이사장, 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의 손자인 이종걸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비롯한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3·1절 100주년인 지난 3월 1일 서울 세종대로에서 열린 고종 장례행렬 재현 만세 행진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행진하고 있다. [뉴스1]

박원순 서울시장이 약 5년 전쯤 이 이사장에게 운현궁에서 살라고 제안했지만, 이 이사장은 "전주는 태조 이성계 할아버님의 어진(임금의 초상화)이 있는 곳으로 우리 조상이 조선을 일으킨 곳"이라며 고사했다고 한다. 이 이사장은 2006년 8월 황실문화재단을 만들어 '조선 황실 복원 운동'을 펼치고 있다. 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대통령이 있어도 상징적인 왕실을 만들어 역사·문화·전통으로 삼자"는 취지다.

전주시는 2010년 '황손과 함께 하는 전통문화 체험'을 시작하면서 해마다 황실문화재단에 보조금을 주고 있다. 보조금 대부분은 이 이사장의 강의료와 활동비, 재단의 물품 구입비와 홍보비·교재인쇄비, 승광재의 공공요금·업무지원비 등에 쓰인다. 이 이사장의 강의료는 1회당(4~5시간) 100만원으로 책정됐다.

재단에 대한 지원을 두고 '전주시 보조금 지원 조례' 등의 법적 근거 없이 이뤄지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서난이 전주시의원은 "'마지막 황손'을 예우하고 콘텐트로 활용하려면 관련 규정을 마련해 인건비나 재단 관리비를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지적했다.

지난 2017년 3월 1일 이석 황실문화재단 이사장이 직접 쓴 3·1절 기고문. [사진 황실문화재단]

지난 2017년 3월 1일 이석 황실문화재단 이사장이 직접 쓴 3·1절 기고문. [사진 황실문화재단]

이에 전주시는 "해당 프로그램은 '문화예술진흥에 관한 조례'를 폭넓게 적용할 수 있고, 황손 개인이 아닌 재단을 지원한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이 프로그램은 조선 왕조 발상지로서 전주의 위상을 높이고 전주 한옥마을의 콘텐트를 강화하는 효과가 커 재단에 지원하는 비용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강조했다. 또 "외국 대사 등이 전주를 찾을 때 도지사나 시장보다 먼저 방문하는 대상이 이 이사장이어서 예우 차원도 있다"고 했다.

온라인에서는 "계급 사회도 아닌데 황손이라는 이유만으로 지자체가 예산을 지원하는 건 특혜이자 혈세 낭비"라는 반대론과 "놀면서 받는 것도 아니고, 왕실 후손이 역사 해설까지 하는데 이 정도 지원은 괜찮다"는 찬성론이 맞섰다.

당시 재단 내부에선 "황손이 전주를 위해 열심히 활동하고, 전주시 보조금도 공짜로 받는 게 아닌데 억울하다"는 볼멘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 이사장은 "일절 대응하지 말라"고 지시한 것으로 확인됐다. 외려 그는 "욕을 많이 먹어야 오래 산다"며 웃어넘겼다고 한다.

이 이사장은 크리스마스이브인 지난 24일 김승수 전주시장 등과 함께 소외된 이웃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후원금 800만원을 전달했다. 풍남동에 사는 저소득층 청소년 3명과 호성보육원에 각각 100만원씩 400만원을, 장애인복지시설 19곳에 모두 400만원을 건넸다.

이석 황실문화재단 이사장이 3·1절인 지난 2017년 3월 1일 전주 한옥마을 승광재에서 관광객 등과 함께 만세 삼창을 하고 있다. [사진 황실문화재단]

이석 황실문화재단 이사장이 3·1절인 지난 2017년 3월 1일 전주 한옥마을 승광재에서 관광객 등과 함께 만세 삼창을 하고 있다. [사진 황실문화재단]

이 이사장의 한 측근은 "황손님은 그동안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계시는 나눔의 집에 가시는 등 소외된 이웃을 위해 여러 가지 봉사를 해 오셨다"고 말했다. 주민센터를 통해 계란 수십 판, 손수건 수백장을 사회복지시설에 전달하는 식이다. 이 이사장은 측근을 통해 "내가 받은 사랑만큼 돌려줘야 한다는 마음에서 소소하지만, 후원금을 내고 있다"며 "국민이 잘살고, 다 같이 상부상조하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는 뜻을 밝혔다.

전주=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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