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오전 9시 국회 로텐더홀에서 열린 자유한국당 최고위원회의. 평소 회의 땐 볼 수 없던 의외의 인물이 등장했다. 상·하의와 외투, 신발까지 모두 검은색으로 맞춰 입은 배현진 송파을 당협위원장이었다. 회의 진행을 맡은 이창수 대변인의 소개와 함께 굳은 표정으로 단상 앞에 선 배 위원장은 병원에 입원 중인 황교안 대표의 ‘병상 메시지’를 대독했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보통 당 대표 메시지 대독은 당 대표 비서실장이나 대변인이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배 위원장은 현재 대변인 등 당직도 없고, 원내에 있지도 않다. 게다가 이날 회의는 국회 본회의에 상정된 공직선거법 개정안에 대해 자유한국당이 신청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가 끝난 지 9시간 뒤이자 27일 본회의를 하루 앞둔 ‘전시 상황’에 열린 회의였다. 이 때문에 배 위원장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더 큰 관심이 쏠렸다.
배경을 잘 아는 당내 인사들에 따르면 "배 위원장에게 대독을 맡긴 것 자체가 홍 전 대표에게 보내는 황 대표의 화해의 제스처"라는 거다. 홍 전 대표는 최근 황 대표를 겨냥해 "당에도 없던 분들이 모여 30년 정당을 독식하려고 덤빈다" ""사장 하던 사람이 갑자기 머리에 띠를 매고 노조위원장을 하는 느낌" 등 쓴소리를 냈다. 배 위원장은 홍 전 대표 시기에 당에 영입됐고, TV 홍카콜라 제작자도 했던 터라 ‘홍준표 키즈’로 불린다.
익명을 요구한 당 관계자는 “홍 전 대표와 (갈등을) 멈추고, 내부적으로 단합하자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배 위원장에게 대독을 맡기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며 “메시지 내용에도 보수가 뭉쳐야 한다는 내용이 있는 만큼 황 대표도 이에 동의해 전날 밤 급히 배 위원장에게 연락했다”고 말했다. 또한 국민에게 힘을 모아 달라고 호소하는 등 감성적 내용이 많은 만큼, 아나운서 출신인 배 위원장이 전달력 등에서 적합하다는 판단도 있었다고 한다.
실제 이날 황 대표의 병상 메시지에는 “당에 계시지 못한 많은 분들도 황교안과 함께 죽음 각오하고 폭정 막아내자”, “함께 자유 우파 방어막을 만들자”, “민주주의가 무너지는데 당의 울타리가 무슨 소용인가. 다 걷어내고 함께 맞서 싸우자”와 같은 내용이 담겼다.
이 때문인지 홍 전 대표도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통합과 관련 글을 올렸다. 홍 전 대표는 “1991년 3당 합당 모델을 상기해야 한다”며 “통합하지 않고는 총선도 대선도 없다”고 적었다. 다만 그는 “통합 비대위를 만들자”는 제안도 덧붙였다. 이는 통합을 위해선 황 대표가 당권을 내려놓아야만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한편 이날 배 위원장의 대독 등을 두고 당내에서 "배 위원장이 '친홍'에서 '친황'으로 갈아타는 거 아니냐"는 지적도 있었다. 이에 대해 배 위원장은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당원의 한 사람으로서, 요청을 받았으니 가서 역할을 했을 뿐 특별히 저를 부른 이유를 묻지도 않았고, 궁금해할 사안도 아니다”고 말했다. 또한 '친홍' '친황' 여부에 대해선 "저는 배현진일 뿐 누구 편의 배현진이 아니다”며 “두 분 다 존경하는 정치 선배"라고 전했다.
윤정민 기자 yunj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