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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 물들인 '돼지 핏물'…급하게 '모두 살처분' 최선이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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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오후 경기도 연천군 중면 민간인 출입통제선(민통선) 내 임진강 상류 마거천. 지난달 10∼11일 아프리카돼지열병(ASF) 확산방지 차원에서 연천군 내에 남은 4만7000마리의 돼지를 급히 예방적 살처분한 뒤 매몰지 조성 때까지 임시로 쌓아뒀던 장소에서 돼지 핏물이 흘러들었던 하천이다.

아프리카돼지열병 발병 100일

돼지 핏물 유출지점 하천은 연천·동두천 취수장까지는 하천 길이로 13㎞ 거리이고, 연천·동두천 주민의 상수원보호구역과 인접한 곳이다. 돼지 4만7000마리를 매몰했던 곳은 상수원 상류 하천과 50m로 인접한 곳이다.

이날 매몰지에 대한 언론의 현장 취재는 통제된 상태였다. 지난달 붉은 핏물로 뒤덮였던 매몰지와 800여m 떨어진 민통선 내 마거천 하류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살처분 돼지 매몰 작업 당시 마거천 주변 지역에 가득했던 악취도 더는 나지 않았다. 마거천 옆에는 전기 울타리와 철조망이 1∼2겹으로 쳐져 있었다. 민통선 내부에도 어른 키 높이 정도의 울타리가 사방으로 설치돼 있었다.

현장을 안내한 민통선 출입영농민 이병주(62)씨는 “지난달 살처분 된 돼지 4만7000마리를 모두 매몰한 직후부터 더는 하천으로 돼지 핏물이 유입되지 않고, 악취도 거의 사라진 상태”라고 말했다. 그는 “민통선 지역 울타리는 야생 멧돼지가 민통선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차단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라고 소개했다.

지난달 10~11일 살처분한 뒤 쌓아둔 돼지의 핏물이 흘러들어 붉은 빛깔로 변했던 경기도 연천군 중면 임진강 상류 마거천의 지난 23일 모습. 지난달 중순 돼지 4만7000마리를 모두 매몰한 뒤에는 맑은 하천 모습을 되찾았다. 전익진 기자

지난달 10~11일 살처분한 뒤 쌓아둔 돼지의 핏물이 흘러들어 붉은 빛깔로 변했던 경기도 연천군 중면 임진강 상류 마거천의 지난 23일 모습. 지난달 중순 돼지 4만7000마리를 모두 매몰한 뒤에는 맑은 하천 모습을 되찾았다. 전익진 기자

돼지 핏물 유출 임진강 상류는 제 모습 찾아  

하지만 울타리 설치지역 가운데는 빈틈도 곳곳에서 목격됐다. 민통선과 접한 지역의 한 농장에서는 3m 정도 넓이의 대형 출입문 울타리가 활짝 열려 있었다. 울타리 출입문에 붙어 있는 ‘출입 후에는 반드시 문을 닫고 연결고리를 걸어달라’는 환경부 장관과 연천군수 명의의 경고문 내용이 무색했다.

일부 구간에서는 울타리 옆으로 산비탈이 1m 정도 거리로 바짝 붙어 있어 야생멧돼지가 산비탈에서 울타리 바깥으로 훌쩍 뛰어내릴 수 있는 구조로 돼 있었다. 이곳 민통선 바깥지역 도로변 곳곳에는 돼지 사육 농민들이 붙여 놓은 플래카드가 보였다. ‘근거 없는 살처분 즉각 중단하라’ ‘멧돼지 살리려다 양돈농가 다 잡았다’는 내용이었다.

지난 23일 오후 경기도 연천군 중면 민통선 인근 지역 도로변. 연천 양돈농민들이 지난달 내걸었던 ‘근거없는 살처분 즉각 중단하라’는 내용의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전익진 기자

지난 23일 오후 경기도 연천군 중면 민통선 인근 지역 도로변. 연천 양돈농민들이 지난달 내걸었던 ‘근거없는 살처분 즉각 중단하라’는 내용의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전익진 기자

연천군에서는 지난 9월 18일 백학면에 이어 지난 10월 9일 신서면 등 2개 양돈 농장에서 ASF 확진 판정이 나왔다. 농림축산식품부는 74개 모든 양돈농가의 총 19만7000 마리 돼지를 살처분하거나 수매를 통해 없애기로 했고, 연천군은 지난달 중순까지 작업을 마쳤다. 연천군 민통선 일대와 DMZ(비무장지대)에서는 지난 10월 3일부터 현재까지 총 15마리의 야생 멧돼지 폐사체에서 ASF 바이러스가 검출됐다.

ASF 발생지역 돼지는 모두 사라져…양돈 농가는 경영난

국내 처음으로 지난 9월 17일 경기도 파주시 돼지농장에서 확진된 ASF가 25일로 발생 100일째를 맞았다. 그동안 10월 9일까지 경기 파주·연천·김포 등 9건, 인천 강화 5건 등 접경지역에서만 총 14건의 ASF가 발생했다.

지난달 11일 낮 경기도 연천군 중면 마거리 민통선 내 임진강 상류 마거천 인근에 마련된 살처분 돼지 매몰지. 전익진 기자

지난달 11일 낮 경기도 연천군 중면 마거리 민통선 내 임진강 상류 마거천 인근에 마련된 살처분 돼지 매몰지. 전익진 기자

이와 관련, ASF가 발생한 접경지역과 전문가들 사이에선 확산 차단이 아무리 급했다고 ‘모두 살처분’이 최선이었느냐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정부는 발생지역의 지자체별로 모든 돼지를 없애는 강도 높은 확산 차단대책을 시행했다.

지난 23일 오후 빈 돼지농장에서 만난 연천군 군남면 왕림리 양주축산 이장원(64) 대표는 “연천에서 ASF가 발생한 2개 돼지 농장과 14㎞, 16㎞씩 떨어져 있는데 키우는 돼지 9500마리가 모두 예방적 살처분됐다”며 “정부가 감염 경로와 발병 원인도 밝혀지지 않은 가운데 당초 정한 SOP(긴급행동지침) 상 살처분 범위(500m 이내) 규정을 스스로 어긴 예방적 살처분 조치여서 어이가 없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또 “지난 5월 북한 지역에서 ASF가 발생 뉴스를 접하고 곧바로 5600만원을 들여 1.8m 높이로 농장 주변에 울타리를 치고 출입자 및 농장에 대한 방역 소독을 농장 자체적으로 선제적으로 철저히 해 왔는데 합당한 근거도 없이 모든 돼지를 예방적 차원에서 살처분 조치당해 경영난에 빠진 게 억울하다”고 항변했다. 그는 “야생멧돼지 등 접촉 때문에 주로 전파되는 ASF의 특성을 볼 때 이 정도 자체방역이면 충분히 예방할 수 있다고 본다”며 “농가의 경제적 피해가 더는 커지지 않도록 이제는 재입식이 하루빨리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 23일 오후 경기도 연천군 중면 민통선 근처 농장 외곽에 설치된 야생 멧돼지 차단을 위한 울타리. 잠겨 있어야 하는 출입문이 활짝 열려 있다. 전익진 기자

지난 23일 오후 경기도 연천군 중면 민통선 근처 농장 외곽에 설치된 야생 멧돼지 차단을 위한 울타리. 잠겨 있어야 하는 출입문이 활짝 열려 있다. 전익진 기자

“SOP 매뉴얼 상 살처분 반경 범위 넘어서 살처분 된 것 문제”  

이에 따라 예방적 살처분이 행정 편의적으로 남발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경기도 김포시에서 양돈 농장을 운영 중인 A씨(45)는 “ASF 발생농장은 아니었으나 예방적 살처분 차원에서 키우던 돼지가 모두 살처분됐다”며 SOP 매뉴얼 상 살처분 반경 범위를 넘어서 살처분 된 것에 문제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예방적 살처분에서 행정구역상으로 대상을 정하는 것도 문제라며 살처분에 있어서도 농장주는 물론 양돈협회 중앙회장과의 논의도 이뤄지지 않은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정부가 살처분 비용을 보상으로 간주하고 임무를 다했다고 하려는 것 같아 우려된다고도 했다. 농장주들의 의견을 화상 통화 등으로 조금이라도 듣고 반영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푸념했다.

동물자유연대 법률지원센터 변주은 변호사는 “정부가 SOP 규정을 따르지 않고 행적 편의를 위해 행정구역 단위로 확대한 예방적 살처분 조치는 과학적 근거로 다시 정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부는 ‘SOP를 뛰어넘는 과감한 대응’을 강조할 정도로 전혀 문제의식 없는 상황”이라며 “가축전염병예방법 제20조 제1항 단서조항에 따른 예방적 살처분 규정에 ‘퍼지거나 퍼질 것으로 우려되는 지역’까지 살처분 확대할 수 있게 돼 있는데 사람마다 판단이 다른 모호한 문구로 규정한 것부터가 잘못”이라고 설명했다.

지난달 10일 낮 경기도 연천군 중면 마거리 민통선 내 임진강 상류 마거천. 상수원보호구역과 인접한 하천이 인근 살처분 돼지 매몰지에서 흘러나온 침출수로 핏빛으로 변한 모습. [사진 독자 제공]

지난달 10일 낮 경기도 연천군 중면 마거리 민통선 내 임진강 상류 마거천. 상수원보호구역과 인접한 하천이 인근 살처분 돼지 매몰지에서 흘러나온 침출수로 핏빛으로 변한 모습. [사진 독자 제공]

“예방적 살처분, 과학적 데이터 충분치 않을 때 신중해야”  

함태성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예방적 살처분 조치는 과학적 데이터가 충분치 않을 때 신중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동물자유연대 측은 과학적 기준으로 합리적 살처분 기준 만들고, 임의 확대 금지, 동물 고통 최소화 방안 적용, 외부 모니터링 요원 살처분 참관, 작업자 심리적 충격 최소화 방안 등 필요하다고 요구하고 있다.

발생지역에 대한 통제 우선 조치도 논란이 되고 있다. ASF 확산으로 지난 10월 2일부터 중단된 경기도 파주지역 안보 관광도 재개 전망이 불투명하다.

정부가 파주 안보관광 지역 내 설치된 2차 울타리 내의 멧돼지 전수 포획 및 폐사체를 전수 검사해 ASF 추가 감염 가능성이 없는 경우, 위험도가 낮아졌다고 판단 가능할 때 관광이 재개될 수 있다는 검토 결과를 줬기 때문이다. 노현기 파주환경운동연합 공동의장은 “돼지 11만400마리가 살처분된 파주 지역에 산다. 사태가 장기화하는 것 같은데 언제까지 (돼지를) 죽이고 (민통선)을 통제할 건가”라고 지적했다.

연천 임진강 상류 하천 돼지 핏물 오염 사태는 정부 측의 무리한 살처분 독려로 인해 빚어졌다는 지적도 나왔다. 지난 17일〈가축전염병, 살처분이 해법인가?〉 토론회에서 한 환경단체 관계자는 “연천 (임진강) 돼지 핏물 사태에 대해 연천군 공무원도 ‘질병관리본부로부터 며칠 안에 전부 살처분하라고, 매몰지 없다고 해도 빨리 대책 세우라고 재촉받아서…’ 라고 하더라”고 말했다.

정부가 지자체를 상대로 조기 살처분을 몰아붙인 정황이다. 이런 결과 미처 매몰지를 구하지 못한 가운데 임진강 상류에서 4만7000마리가 한꺼번에 하천변 매몰지 땅 위에 며칠씩 쌓이면서 ‘돼지 핏물 하천 오염’ 사태가 났다는 것이다.

이석우 연천임진강시민네트워크 공동대표는 “이번에 사육 돼지가 모두 없어진 접경지역 도시에서는 완벽한 ASF 차단과 최고의 방역 대책을 갖춘 상태에서 새 출발을 해야 재발을 방지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광철 연천군수는 “연천군 관내 19만7000마리 모든 돼지를 지난달 중순까지 예방적 차원에서 모두 살처분하고 수매해 없애는 고육지책의 대처에 나선 것은 정부가 ASF 확산 방지 차원에서 발생 지역에 대해 정한 지침을 충실히 이행한 것”이라고 말했다.

연천·파주·김포=전익진·심석용 기자, 김정연 기자 ijj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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