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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객 발목 부러뜨린 구급대원, 바디캠 속 웃음에 판결 갈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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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19일 전북 정읍시 한 초등학교 인근에서 현장에 출동한 구급대원 A씨(34)에게 욕설을 하고 난동을 피우다가 제압당하는 과정에서 전치 6주 골절상 등을 입은 B씨(50)의 상처 부위. [사진 B씨 유족]

지난해 9월 19일 전북 정읍시 한 초등학교 인근에서 현장에 출동한 구급대원 A씨(34)에게 욕설을 하고 난동을 피우다가 제압당하는 과정에서 전치 6주 골절상 등을 입은 B씨(50)의 상처 부위. [사진 B씨 유족]

법원 "취객 제압한 구급대원, 정당방위 아니다" 

"피고인(구급대원)의 행위와 피해자(취객)의 골절상 사이 인과관계가 인정된다. 정당방위도 아니다."

전주지법 "상해 인과관계 인정" 유죄 선고 #국민참여재판, 15시간30분간 공방 치열 #檢 "선 넘은 공격" VS 변호인 "정당방위" #피해자, 10월 '심혈관 질환 악화' 사망 #모친 "죽기 닷새前까지 재판 걱정" 눈물

24일 오전 2시 30분 전북 전주시 만성동 전주지법 201호 법정. 주먹을 휘두르는 50대 취객을 제압하다 발목을 부러뜨린 혐의(상해)로 기소된 정읍소방서 소속 구급대원 A씨(34·소방교)에 대해 1심 재판부는 "유죄 의견을 낸 배심원단의 평결을 받아들여 벌금 200만원을 선고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배심원 7명 중 5명이 유죄, 2명이 무죄 의견을 냈다. 전날 오전 11시에 시작된 재판은 공방이 길어지면서 24일까지 이어졌다.

A씨는 지난해 9월 19일 오후 8시쯤 전북 정읍시 한 초등학교 인근에서 술에 취해 욕설과 함께 주먹을 휘두르는 B씨(50)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발목 골절 등 6주간의 부상을 입힌 혐의로 기소됐다. 검찰에 따르면 A씨는 사건 당일 오후 7시 40분쯤 "아들이 쓰러졌다"는 B씨 어머니(72)의 신고를 받고 동료 2명과 함께 현장에 출동했다.

현장에 도착한 A씨는 B씨가 별다른 이상이 없는 것을 확인 후 "인근 병원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B씨는 "전북대병원으로 후송해 달라"고 욕설을 퍼부으며 A씨에게 때릴 듯이 달려들었다. 당시 B씨는 만취 상태였다.

두 사람의 실랑이는 10여분간 이어졌다. A씨는 B씨 몸을 밀쳐 바로 옆 주차된 화물차 적재함에 B씨 등이 닿게 한 채 목이 꺾일 정도로 약 20초간 짓눌렀다가 놔줬다. B씨가 다시 A씨 얼굴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자 A씨는 양팔로 B씨 목을 감싸 뒤로 바닥에 넘어뜨린 뒤 넘어진 B씨 몸 위에 올라타 수초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B씨는 6주간의 치료가 필요한 발목과 종아리뼈 골절상을 입었다.

B씨 어머니는 A씨를 경찰에 고발했고, 검찰은 지난 3월 29일 A씨를 벌금 100만원에 약식기소했다. 하지만 법원은 양측 주장이 첨예하게 엇갈리는 점을 감안해 직권으로 정식 재판에 회부했다. A씨는 지난 7월 4일 열린 1심 첫 공판에서 "국민참여재판을 받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담당 재판부도 전주지법 형사3부(부장 방승만)로 바뀌었다.

지난해 9월 19일 전북 정읍시 한 초등학교 인근에서 현장에 출동한 구급대원 A씨(34)에게 욕설을 하고 난동을 피우다가 제압당하는 과정에서 전치 6주 골절상 등을 입은 B씨(50)의 상처 부위. [사진 B씨 유족]

지난해 9월 19일 전북 정읍시 한 초등학교 인근에서 현장에 출동한 구급대원 A씨(34)에게 욕설을 하고 난동을 피우다가 제압당하는 과정에서 전치 6주 골절상 등을 입은 B씨(50)의 상처 부위. [사진 B씨 유족]

구급대원 "악성 민원인" VS 檢 "선 넘은 공격"

전날 오전 11시부터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된 A씨 재판은 15시간 30분 만에 끝날 만큼 양측 공방이 치열했다. A씨 변호인 측은 "피해자는 단순 주취자가 아니라 폭력을 휘두른 악성 민원인"이라며 무죄를 주장했고, 검찰 측은 "피고인의 제압 행위는 소방공무원으로서 지켜야 할 기준을 넘어선 공격"이라고 맞섰다.

검찰 측에선 전주지검 강병하 공판검사와 이 사건을 수사하고 A씨를 기소한 수사검사인 정읍지청 정현욱 검사가 나왔다. A씨는 대한변호사협회 소방관 법률지원단 소속 이한명·주어진·신영준·하동권·박형윤 변호사와 함께 참석했다.

강병하 검사는 "검찰은 피고인의 피해자에 대한 범행보다 피해자의 피고인에 대한 범행을 더 엄중하게 바라봤다"며 "그러나 이 사건이 발생한 지 1년여가 지난 올해 10월 30일 심혈관 질환 등을 앓던 피해자는 그토록 가고 싶던 전북대병원에서 사망했다"며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피해자가 119구급대원을 괴롭히기 위해 허위 신고를 한 게 아니었다"는 점을 부각한 것이다. 앞서 검찰은 A씨를 약식기소한 날 B씨도 소방기본법 위반죄로 정식 재판에 넘겼다.

지난해 9월 19일 전북 정읍시 한 초등학교 인근에서 현장에 출동한 구급대원 A씨(34)에게 욕설을 하고 난동을 피우다가 제압당하는 과정에서 전치 6주 골절상 등을 입은 B씨(50)의 상처 부위. [사진 B씨 유족]

지난해 9월 19일 전북 정읍시 한 초등학교 인근에서 현장에 출동한 구급대원 A씨(34)에게 욕설을 하고 난동을 피우다가 제압당하는 과정에서 전치 6주 골절상 등을 입은 B씨(50)의 상처 부위. [사진 B씨 유족]

"피해자 난동 있었어도 과잉 진압 용서되지 않아" 

검찰 측은 "피고인의 제압 행위는 단순한 방어나 대응이기보다 사실상 병약했던 피해자에 대한 공격으로 보고 기소했다"고 밝혔다. B씨는 전북대병원에서 심혈관 조영술을 두 차례 받았고, 사건 당일도 정읍의 한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한 것으로 확인됐다.

강 검사는 "피해자가 욕설을 하고 난동을 피운 사정만으로 피해자에 대한 피고인의 일방적 폭행과 과잉 진압이 지워지지 않는다"며 "(피고인을 처벌하지 않으면) 술에 취한 민원인에게는 부당하게 유형력(신체적 고통을 주는 물리력)을 행사해도 된다는 잘못된 선례를 남길 수 있고, 현장 공무원에 대한 법적 특혜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변호인 측은 B씨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면서도 "망인의 사인은 피고인의 행위와 직접적 인과 관계가 없다"고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 "피고인의 제압 행위 때문에 피해자 발목이 골절됐는지 분명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9월 19일 전북 정읍시 한 초등학교 인근에서 현장에 출동한 구급대원 A씨(34)에게 욕설을 하고 난동을 피우다가 제압당하는 과정에서 전치 6주 골절상 등을 입은 B씨(50)의 상처 부위. [사진 B씨 유족]

지난해 9월 19일 전북 정읍시 한 초등학교 인근에서 현장에 출동한 구급대원 A씨(34)에게 욕설을 하고 난동을 피우다가 제압당하는 과정에서 전치 6주 골절상 등을 입은 B씨(50)의 상처 부위. [사진 B씨 유족]

"3년간 119구급대 25번 불러…그대로 당하나"

또 "피고인이 상해를 가하려는 고의가 없었고, 설사 상해를 가했더라도 피고인 얼굴에 주먹을 뻗는 피해자를 막기 위한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했다. 변호인 측은 "피해자는 3년간 119구급대를 25번 불렀다. 10번은 만취 상태였고, 매번 장거리 이송 요청을 했다. 구급대원에 대한 욕설과 폭행도 처음이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배심원들에게 주취자가 어떤 행동을 하고, 욕설을 가했을 때 소방관이 어느 정도 제압 행위를 해야 유죄가 되는지 묻고 싶다"고 했다.

변호인 측은 "정읍에서 전북대병원이 있는 전주까지 왕복 2시간이 걸린다. 원칙적으로 119구급대는 골든타임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근거리 이송이 원칙이다. 119구급대가 응급 환자가 아닌데도 장거리 이송을 할 경우 지역 내 구급대의 공백이 생긴다"고 했다. 그러면서 "피해자 모친은 피고인에게 '성의를 보여 달라'며 합의금을 요구했다. 금액은 2000만원에서 5700만원까지 올라갔다. 피고인은 대출을 받아 합의를 보려고 했지만, 합의는 하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B씨 어머니는 "(A씨에게) '잘못했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찾아 갔다. 먼저 합의금을 요구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오히려 "아들이 기브스를 한 상태에서 소방관 2명이 집에 찾아 와 '(소방기본법 위반은) 벌금 5000만원에 5년 이하 징역에 처할 수 있다'고 협박했다"고 주장했다. B씨의 골절상 수술비는 약 1400만원이 들었다고 한다.

지난해 9월 19일 전북 정읍시 한 초등학교 인근에서 현장에 출동한 구급대원 A씨(34)에게 욕설을 하고 난동을 피우다가 제압당하는 과정에서 전치 6주 골절상 등을 입은 B씨(50)의 상처 부위. [사진 B씨 유족]

지난해 9월 19일 전북 정읍시 한 초등학교 인근에서 현장에 출동한 구급대원 A씨(34)에게 욕설을 하고 난동을 피우다가 제압당하는 과정에서 전치 6주 골절상 등을 입은 B씨(50)의 상처 부위. [사진 B씨 유족]

웃음 담긴 바디캠 영상이 유무죄 갈랐다? 

이날 배심원 대다수가 검찰 손을 들어준 건 법정에서 공개된 사건 당일 구급차 블랙박스 영상과 구급대원 몸에 달린 바디캠 영상이 결정적이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바디캠에는 당시 A씨가 B씨 목을 잡아 내팽개치는 장면이 찍혔다. 검찰 측은 "A씨는 B씨에게 반말을 하거나 헛웃음과 비웃음으로 일관했다. 반면 피해자는 욕설과 반말·고성으로 일관했지만, 구급대원에 대한 구체적이고 공격적인 유형력 행사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바디캠 영상에는 A씨가 B씨 모자에게 "경찰 부르세요, 선생님" "가만히 계실 거예요?" "고발하세요. 법정 가게요" "저 코치하지 마세요" "멱살 잡았잖아요"라고 말하면서 '흐흐' 피식피식 웃는 소리가 담겼다. 강 검사는 "피해자 어머니는 현장에 출동한 119구급대원들이 자기 자식을 약 올리고 있다고 판단했다"며 "피해자가 욕설하고 난동을 피운 것은 잘못이지만, 피고인이 부추긴 측면도 있다"고 했다.

이에 변호인 측은 "자신을 도와주러 온 구급대원에게 격하게 욕설을 하자 주취자 보호는 경찰 소관이기 때문에 경찰을 부르라고 한 거다. 지극히 통상적인 절차"라고 반박했다. 또 "A씨 어투는 도발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피해자를 진정시키는 취지였다"고 했다. 웃음 소리에 대해서는 "주취자를 많이 겪은 피고인 입장에서는 '일진이 사납다'고 느낄 수 있고 여기서 나오는 자조 섞인 웃음이거나 헛웃음일 수 있다"고 했다.

검찰이 제시한 현장 인근 편의점 폐쇄회로TV(CCTV)에는 B씨가 발목 통증을 호소하는 장면도 담겼다. B씨와 어머니가 30분간 길바닥에 앉아 있고, 어머니가 B씨 발목을 보며 10분간 어루만져 준다. B씨는 어머니 부축을 받고 택시에 탔다.

지난 3월 서울 양천소방서에서 119 구급대원이 주취자 이송 중 폭행 상황을 가정해 구급차 내부에 설치된 비상벨을 누르는 시연을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3월 서울 양천소방서에서 119 구급대원이 주취자 이송 중 폭행 상황을 가정해 구급차 내부에 설치된 비상벨을 누르는 시연을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피해자 모친 "사건 이후 아들도, 나도 우울증 걸려" 

B씨 어머니도 이날 증인으로 나왔다. B씨 어머니는 "(제압 당시) 아들은 허리가 꺾여 아무 말도 못했다"며 사건 직후 B씨 목과 팔뚝 살갗이 벗겨지거나 오른발이 퉁퉁 부은 사진들을 재판부와 배심원들에게 보여줬다. A씨 쪽을 향해서는 "봐, 너도! 이렇게 까졌잖아"라고 소리를 질렀다. B씨 어머니는 "사건 이후 아들도, 나도 우울증에 걸렸다. 죽기 닷새 전까지 아들은 '재판이 어떻게 돼 가냐'고 물으며 걱정했다"며 울분을 토했다.

변호인 측은 최후변론을 통해 "전국 모든 소방관님들이 '갑질' 악성민원에서 벗어나 국민의 소방관으로 자부심을 갖고 화재와 응급 상황으로부터 국민의 소중한 생명을 지키며 존중받을 수 있도록 현명한 판단을 부탁드린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당시 여러 가지 정황, 폭행 행위의 경위 및 내용 등을 종합하면 A씨의 행위는 정당방위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며 유죄를 선고했다.

전주=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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