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성탄절 선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

성탄절 즈음 눈이 오면 좋겠다, 고 생각했다. 유년기의 설레는 기대였고 지금도 무의식 공간에선 여전하다. 곳곳에 성업하던 전파사가 대책 없이 틀어놓은 캐럴에 단련된 유년기의 시간으로 성년의 얼룩진 사건들을 덮고 싶은 탓이다. 연말연시로 다가서는 이즈음 정서가 한 해의 돌출된 장면들을 다시 불러내 자기검열을 해대는 것은 사실 강설(降雪)의 여부와는 아무런 상관은 없다. 그럼에도 한심함이 분명한 나의 소행(所行)과 평균적 한국인의 유난스런 한숨을 자아냈던 과락(科落) 정치가 가슴을 찔러대지 않게 하려면 일단 눈이 오는 것이 좋다. 강설의 공평한 공간에는 녹슬었던 공감의 네트워크가 슬며시 작동하기 시작한다. 충동구매라도 작은 선물을 사는 것은 이 시간에 어울리는 행위다. 가족이든 연인이든 기뻐할 표정을 상상하며 약간 들뜬 귀갓길에 희끗한 눈발이라도 만나면 그것은 소확행임이 분명하다.

선물교환은 축원의 호혜적 행위 #투표와 정권의 답례도 증물교환 #국내외 모두 증오교환으로 일관 #살상 협박이 성탄절 선물인 시대

대체 선물(膳物)이란 무엇인가. 선물에는 중요한 타자에 대한 위안과 축원이 들어 있다. 마음의 답례만으로도 증여의 보상은 충분하다. 선물은 물질적 이득과 사회적 관계를 동시에 생산하는 호혜적 행위라고 원시부족을 관찰한 인류학자 모스(M.Mauss)가 『증여론』에서 말했다. 그의 동료 말리노프스키(B. Malinowski)는 조개껍질 목걸이와 팔찌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뉴기니섬을 돌고 있는 현상을 목격했다. 쿨라교역이라 불린 이 교환행위는 동료 맺기 의례였다. 목걸이와 팔찌는 평화공존, 상호봉사의 징표였고, 때로는 공감과 복종의 표시였다. 선물 증여를 거부하는 부족은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

문명세계도 그렇다. 현대정치에서 투표 행위와 정권의 답례는 일종의 선물교환 행위다. 원시부족의 증물교환은 호혜적 심성에서 출발해 결국 일정 주기에 행하는 주술적 의례로 발전했다. 오늘날은 그것을 아예 헌법조문에 넣었고 제도화했다. 부족민 모두가 춤과 노래로 증물교환을 축하하고 주술사가 천지신명과 교신한다. 이 장면은 미디어와 선거운동원이 동원돼 나라 전체가 시끄러운 오늘날 선거와 흡사하다. 다만 정권을 잡은 집단이 다른 정당 지지자를 죽이지 않는 것이 다르다. 평균 표심(票心)에 답례하는 것, 그래야 부족이 평화롭고, 부족 간 증오가 잦아든다.

기해년 한 해 많은 사람이 사회적 사망(social death)을 당했다. 적폐, 비리, 농단 낙인을 찍힌 채 말이다. 더러는 육신의 생명을 끊는 것으로 사회적 생명을 연장하고자 했다. 부자들이 ‘증여세’를 혐오해 싱가포르와 동남아시아로 떠났다. 최저임금을 감당하지 못해 제 손으로 파산행로를 선택한 영세업자들도 많았다. 식당과 점포가 폐업, 휴업 팻말을 자주 내걸었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비정규직 직종에 내몰린 청년들에게 4차 산업혁명의 전사로 나서라는 시대적 압력이 가해졌으나, 더러는 위험의 전방에서 헛되이 죽었다. 정권은 그런 아우성에 아랑곳 않고 꿋꿋이 ‘정의의 길’을 외롭게 걸었다. 일본과의 합의를 뒤집어 대한해협에 격랑이 일었고, 징용 배상 판결로 한일관계를 1965년으로 되돌려 놓았다. 일본이 수출품목을 제한하자 정권은 갑자기 소·부·장 업체에 관심을 표명했다. ‘조국사태’가 터져 정의 밑천을 다 까먹었는데, ‘나라다운 나라’의 배경에 은닉된 ‘울산 폭탄’이 터졌다. 윤석열 검찰군단의 압수수색은 선물교환이든 음모교환이든 가리지 않는다. 돼지띠 기해년, 수만 마리의 돼지가 살처분됐다. 수백만 마리를 살리려는 불가피한 조치였으나 씨를 뿌리고 거둘 때 주술로 밭을 달래는 산호섬 원시부족보다 훨씬 원시적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기해년 한 해 동북아에는 증오 교환이 횡행했다. 급기야 ‘성탄절 선물’에 살상용 탄도탄이 등장했다. 선물은 절멸의 무력이었다. ‘성탄절을 잘 보내라.’ 평양당국의 메시지에 미군 공군사령관이 창고 무기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오산공군기지에는 수조 원짜리 첨단 정찰기가 뜨고 내린다.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대륙간 탄도탄이 캘리포니아 기지에서 시험 발사됐다. 김정은은 백마를 타고 백두산 결의를 다졌으며, 미하원의 탄핵 통보로 성질이 난 트럼프 대통령은 핵가방을 든 채 선거유세에 나섰다. 미국 협상단장 비건이 정말 빈손으로 돌아갔는지는 의문이나, 그가 판문점을 넘어 평양으로 향할 때 남한의 정당대표들은 국회 의석을 두고 멱살을 잡았다. 평양의 ‘성탄절 선물’에 우리가 교환할 것은 없어보였다. 빈손은 우리였다. 미국의 ‘화염과 분노’가 북한의 ‘공감과 복종’을 확증하지 못해 교환할 선물을 새로 찾아야할 시간, ‘성탄절 선물’은 발사대를 이륙할 연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올 한 해 문명이 야만과 접속한 국내 사례는 차고 넘치는데, 종교적 신심의 인류사를 비꼬는 반종교국가의 반인륜적 협박 속에 세모를 맞는다. 그러니 점포정리 대박세일 집에라도 들러 작은 선물을 사는 것이 좋겠다. 건네줄 누가 딱히 없어도 문명적 야만에 휩쓸린 생명체에게 바치는 공물(供物)이라 생각하면 족하다. 눈발이 굵어지면 더 좋을 것이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포스텍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