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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초등생 유가족 "돌아올줄 알고 30년간 이사도 안갔는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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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착잡하죠. 그래도 언젠가는 돌아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춘재(56)에게 희생된 '화성 실종 초등생' A양(8)의 오빠 B씨는 대화하는 내내 한숨을 쉬었다. 담담하게 이야기를 하면서도 30년 전 갑자기 사라진 동생에 관해 이야기를 할 땐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B씨는 "광명에서 살다가 아버지 일 때문에 화성으로 잠시 이사를 하였는데 이때 동생이 실종됐다"며 "동생이 화성보단 광명집을 잘 알고 있으니 혹시나 찾아올까 봐 30년 간 이사도 하지 않았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30년 만에 확인된 동생의 사망 사실은 충격이었다. 이춘재의 연쇄살인에 의해 희생됐다는 사실도 끔찍한데 과거 경찰이 동생으로 추정되는 유골을 발견하고도 은폐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지난달 23일 오전 경기도 화성시 용주사에서 열린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 희생자 합동 위령재(慰靈齋, 위령제의 불교식 표현)'에서 배용주 경기남부지방경찰청장이 추도사를 마친 후 '화성 실종 초등생' 유가족을 위로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23일 오전 경기도 화성시 용주사에서 열린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 희생자 합동 위령재(慰靈齋, 위령제의 불교식 표현)'에서 배용주 경기남부지방경찰청장이 추도사를 마친 후 '화성 실종 초등생' 유가족을 위로하고 있다. [연합뉴스]

줄넘기로 결박된 유골…이춘재도 "줄넘기" 언급

경기남부지방경찰청 전담 수사본부는 17일 브리핑을 열고 화성 실종 초등생 사건을 수사했던 형사계장 이씨와 경찰관 1명을 사체은닉 및 증거인멸 등 혐의로 입건했다고 밝혔다.
A양은 1989년 7월 7일 오후 학교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실종됐다. 같은 해 12월 인근 야산에서 A양의 속옷과 가방 등 유류품이 발견되긴 했지만, 시신은 찾지 못했다. 실종사건으로 분류된 이 사건은 이춘재가 자신의 범행이라고 자백하면서 재조명됐다. 경찰은 구체적인 이춘재의 자백에 신빙성이 있다고 보고 수사를 벌여왔다. 이 과정에서 과거 경찰관들이 A양의 유골을 발견하고도 은닉한 정황을 확인했다.

"형사계장 유골 발견 뒤 '삽 가지고 와라' 지시 말 들어" 

당시 수사에 참여했던 경찰관 52명과 의경 18명, 동네 주민 등 149명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한 주민으로부터 "89년 초겨울에 형사계장 이씨와 야산을 수색했는데 줄넘기에 결박된 양손 뼈를 발견했다"는 진술을 확보한 것이다. 이 주민은 "형사계장 이씨가 유골을 발견한 뒤 부하직원에게 무전으로 '삽을 가지고 오라'고 지시하는 말을 들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춘재도 경찰 수사에서 "초등생의 손발을 줄넘기로 결박해 범행한 뒤 시신을 유기했다"고 밝혔다.

과거 수사에서 경찰의 의심스러운 행적도 확인됐다. 경찰은 A양의 아버지와 사촌 언니를 그해 12월 25일 조사했다. 당시 A양의 아버지에게 "딸이 줄넘기를 가지고 있었느냐?"는 질문을 했다고 한다. A양의 유류품이 야산에서 발견된 사실도 A양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다. 경찰 관계자는 "정황상 형사계장 이씨 등이 A양의 유골 일부를 발견하고도 은닉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씨 등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며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고 한다.

이춘재가 자백한 '화성 초등생 실종사건'에 대한 시신찾기 수색작업이 지난달 1~9일 진행됐다. 그러나 수색 과정에서 유의미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뉴스1]

이춘재가 자백한 '화성 초등생 실종사건'에 대한 시신찾기 수색작업이 지난달 1~9일 진행됐다. 그러나 수색 과정에서 유의미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뉴스1]

유가족 "지금이라도 사실을 얘기해 달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던 막내딸의 실종에 A양의 아버지는 광명 본가와 화성을 오가며 생활했다고 한다. 경찰 조사를 받을 당시 '줄넘기'를 언급하는 질문도 의심하지 않았다. A양의 오빠는 "과거 수사과정에서 경찰이 'A가 줄넘기를 가지고 등교했느냐?'고 질문했는데 평소 A가 줄넘기를 좋아해서 책가방에 줄넘기를 항상 넣고 다녀서 이상한 질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며 "이사한 집으로 형사가 찾아온 일이 있었는데 그때도 (유류품이나 유골 발견 등에 대한) 말을 하지 않았다"며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이춘재가 자신의 범행이라고 주장한 화성 초등생 실종 사건 유가족들이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최모란 기자

이춘재가 자신의 범행이라고 주장한 화성 초등생 실종 사건 유가족들이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최모란 기자

유가족들은 A양의 시신을 찾을 길이 없는 점에 대해선 아쉬워했다.
이춘재가 자백한 유기장소 등은 택지개발로 도로 등으로 변했다. 실제로 수사본부는 A양의 흔적이라도 찾기 위해 지난달 1일부터 9일까지 이춘재가 자백한 시신 유기 장소 인근 공원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유골 수색 작업을 펼쳤지만, 성과는 없었다. B씨는 "현재 가족들 모두 마음을 추스르는 중"이라며 "동생 죽음의 진실을 알려준 현재 경찰에겐 너무 감사하다. 다만 과거 경찰을 어떻게 할 수 있는 방안이 없어서 아쉽다"고 말했다.

경찰 관계자는 "사건 현장 인근이 토지 개발 등으로 크게 바뀌어 추가 유골 수색 작업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면서 "다만 사건의 실체적 진실 발견을 위한 수사는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최모란·심석용 기자 m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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